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했다.
그분이 모세에게 주신 사명은 가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
율법을 받는 것, 장차 메시아가 나실 가장 위대한 나라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만세에 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명들이 그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가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세는 거기서 그분을 체험했다.
이제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더 이상 단지 관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모세가 그러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단지 관념으로만 생각한다.
모세는 정통 유대인이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지적인 차원에서만 인식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분을 개인적으로 체험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었다.
우리 앞에는 적어도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성경에서 나오는 지식이 있고, 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이 있다. 당신은 어떤 것을 묘사할 수 있고,
또 그것에 대한 지식이 당신에게 있음을 입증할 수 있으며, 또 그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쟁에 대하여 누구나 묘사할 수 있겠지만, 총알과 포탄과 가스와 불이 난무하는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런 종류의 체험을 한다면 그 체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생생한 것이 된다.
모세가 하나님을 체험한 후 그분은 그에게 더 이상 역사(歷史)가 아니었고, 현실 속에서 그를 이끌고 가는 분이 되셨다.
기독교 교파들의 비극적인 실패는 체험 대신 교리를 붙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능력이 많지만, 교리를 설명한다고 해서 모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고 가는 길이 되라고 주어진 것이다.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가고 우리가 만남의 위기 가운데 그분을 체험한다면,
성경은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한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성경은 계속 일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은 이미 완수한 것이다.
성경을 암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하지만,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의 장(章)들을 통째로 인용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지는 못했다.
성경은 그것에 감동을 불어넣으신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내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암기한다 해도 그 암기를 통해 만남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은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했으니 여러분도 그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세가 떨기나무를 알았듯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알듯이 그분을 알 수 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다.
“복음에 의해, 어린양의 피를 통해, 속죄의 능력에 힘입어, 믿음으로, 성경에 의해, 성경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다.”
당신의 풍성한 은혜가
약해지는 제 마음에 힘을 주고,
제게 열정을 불어넣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오!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이
순수하고 따스하고 변함없게 하시고
살아 있는 불이 되게 하소서.
레이 팔머(1808~1887), 로웰 메이슨(1792~1872)
〈제 믿음이 당신을 우러러보나이다〉
- 하나님 임재에 압도되다, A.W.토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