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연합선교회
홈으로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 아바배너링크

의료상담
전체보기
자유게시판
의사친교방
목회자친교방
질문/답변
진료후기
지역섬김 카페
운영위원 카페
사역일지
취재파일
보도자료
공지
아바애경사
사랑의 기도후원
후원자 마당
HOME > 아바카페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한국 의료선교 이야기(언더우드와 명성황후)
IP : 59.7.248.213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8914   작성일 : 22-10-28 18:00:26 |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207&docId=1796195&categoryId=49207&expCategoryId=49207

명성황후와 크리스마스트리

분류 정치/경제/생업 > 정동이야기 > 정동스케치

1894년 가을과 1895년 겨울 사이에 왕비는 나를 매우 자주 불러 서양 나라들과 그들의 관습에 대한 많은 하문을 하셨고,
아주 싹싹하게 잡담을 나누었다. 종종 우리는 통자역의 배석 없이도 얘기하였고,
곧잘 자리를 함께 했던 국왕과 왕세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왕비 전하와 함께 라면
너무도 다정하고 친절하여 때때로 절친한 친구와 마주 앉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리곤 했다.
나는 물론 막중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으며, 나의 임무와 무능력에 대한 생각에 때로 압도당하였다.
한참 있다가 선교단의 기도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왕비에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기를 빌어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것을 가장 유용한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었다.

...... 크리스마스 직전 날에 왕비는 나를 불러, 우리들의 성대한 축제와 그 기원과 의미, 그리고 어떻게
경축하는지에 대해 얘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누가 더 명백한 인도 또는 더 나은 기회를 바랄 수 있었을까?
이런 상태라면 복음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그녀는 골똘히 경청하였고
깊은 관심으로 때때로 돌아보고 나의 강조점을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던 국왕과 왕세자에
대해 가장 활기차고 공감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반복하였다.

며칠 뒤, 나의 조국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더니 그녀는 조금 슬픈 듯이,
“아,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하고, 자유롭고, 강력했더라면!”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나는 미국이 비록 부유하고 강대하지만 가장 위대하거나 최상의 것은 아니고,
죄와 고통과 눈물이 없는 더 나은 땅, 다시 말하여 무한한 영광과 선과 기쁨의 땅을
그리고자 애를 쓰는 중이라고 말함으로써 좀 더 진전된 또 다른 기회가 생겨났다.
왕비는 말할 수 없는 비애감으로 “아, 국왕과 왕세자와 내가 모두 그곳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소리쳤다.

...... 크리스마스 날에 왕비 전하는 근사한 가마를 보내왔는데, 이것은 자신이 직접 타고
다녔던 것으로 푸른 벨벳으로 덮개를 하고 중국산 양단으로 줄을 넣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장막, 돗자리, 옷감뭉치, 그리고 조선에서 생산한 흥미롭고
진귀한 것들과 함께 엄청난 양의 계란, 꿩, 생선, 밤, 대추가, 그리고 조선의 설날에,
나 자신을 위해, 진주나 그와 비슷한 것을 구입하는 데에 쓰라 하시고 또한
나의 작은 아들에게도 줄 선물값으로 하여 오백 원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의 아들은 그 당시 네 살과 다섯 살의 사이였는데, 궁중의 여인들은 궁궐로 올 때
함께 데려오라고 끊임없이 나를 졸라댔다. 물론 두 분 전하의 특별한 요청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한참 있다가 하루는 왕비께서 왜 내가 그 아이를 데려오지 않는지를 하문하셨고,
나는 초청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그 다음날 아이를 데려오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궁궐로 데리고 갔는데,
그랬더니 가마꾼이 가마를 내려놓자 마자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여인들이 그를 와락 움켜쥐고는 의기양양한 채 엄마인 나도 모르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버렸다.

...... 국왕과 왕비는 두 분 다 항상 어린 아이들에 대해 열정어린 호감을 보여주었다. ......
따라서 이 작은 미국인 꼬마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왕비는 밤과
사탕을 가져오게 하였고, 비록 그것은 조선 사람의 눈으로 보거나 외국인으로서도 왕비의
면전에서 먹는다는 것은 나쁜 모양새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당장 그 자리에서
그것을 먹게 하도록 하였는데, (아직 한번도 밤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그의 건강에 대한
걱정도 더하여 나는 왕비 전하께 이 같은 처우는 뒤로 미뤄 주십사 간청하였다.
그의 모습과 재롱은 과도한 찬사를 받았으며, 표현 하나 하나가 반응과 주목을 이끌었다.
왕비는 어머니와 같은 태도로 아들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는데,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열이 너무 난다고 걱정스레 말하였다.

...... 크리스마스 직후에 나는 왕실을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으나,
정말 짜증이 나게도 두 분 전하가 그것을 구경하도록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기에
너무도 조급하였고, 또한 아무도 국왕과 왕비를 문 안에 가둬 바로 자신들의 궁전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아주 엉망이 되고 말았다
.
거기에는 두툼한 가리개, 즉 방을 어둡게 만들 도구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토록 처량하고
작은 촛불이 훤한 햇빛 속에서 비실거리듯 깜박거렸는데, 나는 서양의 관습이 동양의 비판적
시각에 따라 조금은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느꼈다.
[출처 : Lillian H. Underwood, (American Tract Society, 1904), pp.114~117, 118]

[네이버 지식백과] 명성황후와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원형백과 구한말 외국인 공간/정동, 2007.,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명성황후의 용모에 대한 언더우드 부인의 목격담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207&docId=1796198&categoryId=49207&expCategoryId=49207

분류 정치/경제/생업 > 정동이야기 > 정동스케치

왕실 쪽에서 우리를 접견할 준비가 되자 벙커 부인과 나는 가까운 거리의 정원을 가로질러
인도되어 몇 개의 문을 지났더니 한참 있다가 대기실의 출입구에 서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관리들, 내시들, 궁녀들이 반쯤 차 있었고 그 너머로 안쪽의 아주 작은 방에는 국왕과 왕비
그리고 그들의 아들로 16살쯤 된 청년 한 사람이 있었다.

......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정중한 거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권하는 말씀이 있어서,
결국 우리는 8x10 크기의 작은 방에서 조선의 국왕와 왕비와 더불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잡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마주 앉게 되었다. 그 당시와 그 이후에 이어진 알현이 있을 때마다 국왕은 내게
좋은 외모에 다정한 신사라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는 긴 두루마기(touramachi) 즉, 화려한 붉은
색 실크 코트에다, 앞으로 나와 있는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뒤쪽으로 날개가 부착되어 있는 것만
제외하면, 관리들이 착용하고 있는 모자와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왕비도 나의 깊은 관심을 자극하였다. 약간은 창백하고 꽤나 말랐으며, 무언가 날카로운
인상과 명석하게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그녀는 첫인상에 아름답다고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라도 그 같은 얼굴에서 풍기는 힘, 지성, 강한 기질을 읽어내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인데,
대화가 이어지면 질수록 활기, 소박함, 재치,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표정을 밝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단순한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크게 경이로운 매력을 구현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장 긍정적으로 아름다운 순간에 조선 왕비의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 두 분 전하는 친절하게도 조선으로 오는 여행과정, 현재의 안부, 미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
등 나와 관련된 것에는 전부 최상의 관심을 보여주시면서 여러가지를 하문하였다. 대화는 높다란
칸막이 뒤에 선 통역자를 통해 진행되었는데, 결코 눈을 들지 않은 채 그의 몸은 공경의 표시로 거의 반이나 접은 채로 였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왕비를 치료했던 조선의 의원들은 모두 남자로 그들은 실을
이용하여 한쪽은 왕비의 팔목에 묶고 다른 한쪽은 옆방으로 이어져 의원의 손가락에 걸치는
방식으로 맥박을 잰다는 것이다. 또한 왕비의 혀는 내가 전해 듣기에, 의원을 진찰을 위해
마련된 장막에 구멍을 내고 이곳으로 내민다고 하였다. 나는 왕비의 증상이 절개를 하면 그뿐인
작은 종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어떠한 종류의 외과적 도구도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그러한 방식을
단순히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고, 국왕에 의해 단호하게 거절되었기 때문에
인내와 더딘 처치에 도리 없이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 우리가 돌아온 직후 왕비는 내게 매우 독특한 금팔찌 한 쌍을 하사하고자 하여 개인적으로
알현할 수 있도록 나를 초대하였는데, 이는 결혼선물로 주고자 만들라고 명을 내렸으나 우리가
시골로 내려가지 전에 미처 완성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또한 나의 신랑을 위해 아름다운
진주가 박힌 반지 한 세트도 주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우리들의 신혼여행에 대해 하문하였고,
여느 때처럼 그저 다정스럽고 배려가 많았다.


나는 대중들에게 최고의 모습을 나타낸 진짜 왕비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설령 사진을
찍으라고 허락하였다 하더라도, 대화도중에 나타낸 매력적인 감정표현, 그때 발현되는 특성과
지성은 그냥 온화한 표정으로는 절반 밖에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모든 조선의 부인들처럼 머리를 중간에서 갈라 얼굴에서 단단히 잡아당기고 부드럽게 넘겨서
머리 뒤쪽 약간 아래에 매듭을 지은 모습을 하였다. 조그마한 장식(내가 생각하기에, 다른 부인들이
쓴 것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그녀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가늘고 검은 띠로 묶인 채 머리의 위쪽에 얹혀 있었다. 산호와 진주, 또는 보석으로 치장한 금세공이
들어간 한 두 개의 긴 머리핀은 머리 뒤쪽의 매듭을 뚫고 꽂혀 있었다. 그녀는 대개 모든 조선의
여인네들이 입는 것처럼 진주 또는 호박 단추를 채운 노란 비단 저고리(chogerie)에다 아주 길게
늘어진 파란 비단 치마를 입었다. 그녀의 모든 복장은 비단이었는데, 아주 우아하게 앙증맞은 것이었다.

왕비 전하는 장식에는 거의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으며, 이를 착용하는 일도 드물었다.
(커다란 은고리를 즐겨 끼는 북쪽지방의 젊은 소녀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여성들이 귀고리를 하는 경우는 없는데,
왕비도 예외는 아니어서 목걸이와 브로치 또는 팔찌를 한 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수많은 가락지를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무수한 미국의 여인들이 통상적인 수단과
신분과시용으로 사용하는 만큼 그토록 큼직하거나 많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지 않는 유럽산 제품을
한 두 개 낀 것 이상을 본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결코 차본 일이 없는 멋진 시계를 여럿 갖고 있었다.
조선의 관습에 따라 그녀는 기다란 비단 술로 옆구리에 묶어 치장한 상당한 숫자의 금세공 장식을 지녔다.
복색에서 드러난 그녀의 취향이 그토록 소박하고, 그토록 완전하게 세련된 것이라면, 반쯤
문명화한 나라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그녀를 떠올려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출처 : Lillian H. Underwood,  (American Tract Society, 1904), pp.23~25, 89~90]

[네이버 지식백과] 명성황후의 용모에 대한 언더우드 부인의 목격담 (문화원형백과 구한말 외국인 공간/정동, 2007.,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명성황후 앞에서 재롱을 떤 4살 꼬마 언더우드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207&docId=1796194&categoryId=49207&expCategoryId=49207

분류 정치/경제/생업 > 정동이야기 > 정동스케치

...... 크리스마스 날에 왕비 전하는 근사한 가마를 보내왔는데, 이것은 자신이 직접 타고 다녔던 것으로
푸른 벨벳으로 덮개를 하고 중국산 양단으로 줄을 넣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장막, 돗자리, 옷감뭉치,
그리고 조선에서 생산한 흥미롭고 진귀한 것들과 함께 엄청난 양의 계란, 꿩, 생선, 밤, 대추가,
그리고 조선의 설날에, 나 자신을 위해, 진주나 그와 비슷한 것을 구입하는 데에 쓰라 하시고 또한 나의 작은 아들에게도 줄 선물값으로 하여 오백 원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의 아들은 그 당시 네 살과 다섯 살의 사이였는데, 궁중의 여인들은 궁궐로 올 때 함께 데려오라고
끊임없이 나를 졸라댔다. 물론 두 분 전하의 특별한 요청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한참 있다가 하루는 왕비께서 왜 내가 그 아이를 데려오지 않는지를 하문하셨고, 나는 초청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그 다음날 아이를 데려오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궁궐로 데리고 갔는데, 그랬더니 가마꾼이 가마를 내려놓자 마자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여인들이 그를 와락 움켜쥐고는 의기양양한 채 엄마인
나도 모르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버렸다. 대기실에서 알현을 위해 나아가도록 호출되기까지
몇 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납치된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추측하느라
온통 시간을 보냈다. 조금 지나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그가 왕실 가족이 빙 둘러선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국왕과 왕비는 두 분 다 항상 어린 아이들에 대해 열정어린 호감을 보여주었다. 불과 몇 달 전에
국왕은 6살 짜리 소년인 막내 아들을 공격했던 천연두의 신을 달래고자 무당과 사찰에
거의 4십만 달러나 되는 돈을 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작은 미국인 꼬마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왕비는 밤과 사탕을 가져오게 하였고, 비록 그것은 조선 사람의 눈으로
보거나 외국인으로서도 왕비의 면전에서 먹는다는 것은 나쁜 모양새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당장 그 자리에서 그것을 먹게 하도록 하였는데, (아직 한번도 밤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그의 건강에 대한 걱정도 더하여 나는 왕비 전하께 이 같은 처우는 뒤로 미뤄 주십사 간청하였다.
그의 모습과 재롱은 과도한 찬사를 받았으며, 표현 하나 하나가 반응과 주목을 이끌었다.
왕비는 어머니와 같은 태도로 아들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는데,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열이 너무 난다고 걱정스레 말하였다.


우리가 물러날 준비가 되었을 때, 국왕은 황송하옵게도 아기의 앞에서 정말로 무릎을 꿇어 앉아서
그의 ‘옥수(玉手)’로 작은 코트에 단추를 채워주었고 모자끈을 묶으려는 시도를 감행하였는데,
조심스레 고백하자면 익숙하지 않는 당김으로 인해 끈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물론 나는 이 같은
경우 잘못 묶은 리본에 대한 혼란으로 당황하였으나 국왕은 그것은 못 본 체 하였고,
작별인사를 올리자 아이는 다시 궁중여인들에 의해 재빠르게 행방불명되었다.
나는 여인들의 처소에서 특이한 수집품처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건네지면서 쓰다듬어지고
어루만져지고 말을 걸기도 하면서 약간은 놀란 듯도 하지만 얌전히 있는 그를 발견했다.

가엾은 궁중 여인들이여! 가정도 없고 어린 아이도 없고, 그와 같은 목표도 없이
생활하면서 갇힌 삶을 살다보니 그들 속의 어린 아이란 정말이지 신이 보낸 선물인 것이다.
[출처 : Lillian H. Underwood,  (American Tract Society, 1904), pp. 116~117]

[네이버 지식백과] 명성황후 앞에서 재롱을 떤 4살 꼬마 언더우드 (문화원형백과 구한말 외국인 공간/정동, 2007.,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다음게시물 ▲ 믿음의 글 "독(毒)보다 더 무서운 스트레스(Stress)"
▲ <목회자 의료혜택>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선교사 할인
▲ 믿음의 글 "한 목회자의 감동적인 이야기"
  ▶ 한국 의료선교 이야기(언더우드와 명성황후)
이전게시물 ▼ 아바 도서 소개(사탄의 전술전략)
▼ 믿음의 글(갓피플)
▼ 믿음의 글(유투브) "포항침수 피해자 간증"
아바연합선교회
이용약관 메일무단수집거부 개인취급정보방침
아바연합선교회 220-82-06939 대표 박승용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808, 관악센추리타워 910호
TEL 02-889-5442 FAX 02-889-5443 Email abba@abbamission.co.kr
copyrights(c)ABB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