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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의 선교회에서는 새로운 선교기지를 찾기 위해서 닥터 홀
을 오지에 탐사여행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선 정부에서 허가만한다면 전진기지를 세울 예정이었다.
닥터 홀은 서울에 도착한 이후 존스(George Heber Jones)씨와숙소를 함께 쓰고 있었다.
존스씨는 봄이 되면 북쪽의 내륙 깊숙이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닥터 홀도 그와 함께 동반하기로 결정되었다.
존스씨는 조선의 시골지방으로 혹독하고 고생스러운 여행을 시작한 첫 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만주와 접경지인 의주까지는 함께 여행하고
거기에서 서로 갈라져 닥터 홀은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1892년 3월 초순, 춥고 바람이 센 어느날 오후, 이 두 선교사는 길을 떠났다.
이들은 도보여행을 원칙으로 했지만 짐을 실은 말들을 끌고 갔기 때문에 몸이 피곤할 때는 말을 탈 수가 있었다.
11킬로를 걸은 후 여인숙을 찾았지만 방이 얼마나 비좁았는지
누울 때 닥터 홀은 발을 문밖으로 뻗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 다음날을 계속 비가 내려 발뒤꿈치까지 진흙길에 빠져가면서
울에서 북쪽 2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고양(高陽)에 도착해 선교일을 시작했다.
외국인 의사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환자들이 몰려왔다.
오지에서의 첫번째 시술을 시작한 것이다.
존스씨는 그때의 북쪽여행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 한번은 추위에 떨며 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아주 매운
고깃국 한 그릇을 대접받았다.
이 음식은 끓인 것이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받아 먹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그 근처를 거닐다보니
금방 잡은 개 가죽을 지붕에 널어 말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물러보니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보신탕을 먹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한동안 고깃국을 보면 입맛이 없어지고
사실상 여러 달 동안 조선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출처 : 셔우드 홀, 김동열, <닥터 홀의 조선회상>
(좋은 씨앗, 2003); Sherwood Hall, <with stethoscope in asia : korea> (1978)]
[네이버 지식백과]
얼결에 보신탕을 맛있게 먹은 의료선교사 닥터 홀
(문화원형백과 구한말 외국인 공간/정동, 2007.,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