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 작은 교회 이야기
1955년 서울 생- 단 한 번도 시골에서 지내 본 적이 없는 제가 이 곳 강원도 산골짜기 마을에 와서 목회를 한 지 벌써 14년이 다 되어 갑니다. 서울에서 나서 자라고 군대까지 다녀와서 우여곡절 끝에 35살 나이에 방배동 합동정통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학부와 연구원을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1996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부목사로 안양 청암교회에서 7년을 있었으며 거기에서 강원도 원주에 임지가 있다는 말을 평북노회 어르신 목사님들에게서 듣고 처음 이 곳 현재의 ‘방주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원주’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원주를 지나 산 넘고 물 넘기를 한 참- “혹시 이북으로 넘어 가는 거 아냐?”하는 우스갯소리조차도 무겁고 착잡한 마음으로 하였는데 드디어 도착한 곳은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에 있는 ‘황둔찐빵마을’-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아무튼, 주소지는 ‘원주시 신림면...’으로 시작하니 원주가 맞기는 맞습니다.
작은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천변 제법 넓은 터 위에 벽돌 외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교회는 서 있었습니다. 매우 낡고 허름하여 비가 오는 날 예배시간에는 여기저기서 빗물이 똑-똑- 떨어져 대야와 양재기 등을 군데군데 받쳐 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의 청빙의 절차를 거쳐 2대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게 되었는데 성도는 15명 정도가 있었지만 전임 목사님 가정이 빠져나가니까 7~8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절반은 나이 많으신 할머니 어르신들이셨기에 조금 아쉽기는 하였지만 더욱 기도하자는 마음과 설레는 감격으로 그렇게 개척 아닌 그러나 개척 같은 ‘단독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병풍을 두른 듯 한 이곳에서 목회와 가정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처음에는 조금 막막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신 곳’이라는 믿음으로- 역시 시골생활이라고는 해 본적이 없는 아내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한 달 전인 큰 딸아이와 여섯 살 둘째 딸아이와 함께 이 곳 방주교회의 2대 목사로- 하필이면 춥고 추운 겨울날에 그것도 더 춥다는 강원도 산마을 교회에 부임하게 된 것일까요? 허허 하고 지금도 가끔씩 돌이켜 보게 되는 2002년 12월 입니다.
과연 소문대로-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강원도 추위’는 몸도 마음도 다 얼어붙게 하였는데 그 보다도 더 기가 막혀 한숨이 나오게 한 것은 ‘쥐’였습니다. 사택이 교회건물 천변 쪽으로 이어 붙여서 지은- 블록으로 벽을 만들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작고 허름한 가건물 형식인 것 까지는 좋은데, 왠 쥐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면 덮고 자던 이불 위까지 기어 올라왔던 쥐들이 후다닥- 달아나곤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말로는 겨울이 되면 쥐들도 추위를 피하여 민가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단속을 잘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물이 너무 허름하여 어디부터 어떻게 단속을 하여야 할지- 대낮에도 “꺅-!!”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면 아이들 책상위에 쥐들이 컴퓨터를 뛰어 넘어 다니고 있습니다. 우르르르- 벤허의 전차경주처럼 천장 위를 뛰어 다니는 쥐들을 향한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급기야는 고양이를 한 마리 구해서는 천장 전공구를 통하여서 집어넣었다 빼었다 하기를 거듭하기도 하였지요.
‘미안하다 얘들아... 미안해 여보... 하나님 이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입니까? 환경 좀 개선해 주세요...제발... 환경 좀 개선해 주세요...’
그러나 또한 감사 할 것도 많았으니 몇 명이라도 성도들이 있는 것이며, 허름하기는 하지만 교회건물이 있었고, 또 역시 그렇게 비슷한 형편의 작은 사택도 있었고 비록 천(川)으로, 도로로, 둑으로 복잡하게 서로 물려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땅 수백 평이 ‘교회 재산’으로 등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월세 전세금 등에 시달리는 도심 속 작은 지하교회들을 익히 많이 보아 온지라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땅을 사고 개척의 많은 땀을 흘리셨을 전임 목사님과 적은 인원으로 힘에 버거웠을 성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 어떻게 생겼든 이곳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나의 목양지야-!!”
심기일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시작한 것은 ‘교회주변정리’였습니다. 전임 목사님의 사택이 멀리 산속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예배시간을 제외하고는 교회에 사람이 없다보니 이런 저런 쓰레기들이 마당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천변이기에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로 악취가 났고 심지어는 제가 바라보고 있는데도 왜 트럭이 붕- 하고 들어오더니 건축폐기물을 마당에 와르르 부어 놓고 휭-하고 나가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새로 오신 목사님이세요? 여기가 너무 더럽지요... 마을 사람들도 지나가면서 다 외면해요.”
마을 어떤 분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 그 쓰레기들을 치우고 깨끗한 ‘교회마당’을 확보하는 것을 제 일 목표로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사진으로 찍어 놓았던 모습들을 보면서는 지금은 웃게 되지만, 당시가 ‘현재’이었던 그때에는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은 그 마당 땅속에 까지도 묻혀있던 각종 쓰레기들을 파헤쳐서 꺼내 버리기를 계속 하였는데 거기에서 알게 된 사실이 ‘호미부대’의 대단함입니다. 제가 그렇듯 발 벗고 나서자 우리 교회 할머니 집사님들이 손에 손에 호미를 들고서 동참하여 주셨는데 작은 호미의 위력이 그렇게 큰 것일 줄이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는 성경 도처의 말씀을 떠 올리면서 그렇게 틈나는 대로 몇 달을 계속하였더니 이제 쓰레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 되었습니다. 그렇게 봄이 되었고 제가 정한 다음 목표는 쓰레기장을 방불하였던 교회마당을 ‘꽃밭’으로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돈 들여서 기계를 불러 확- 정리를 하고 새 흙을 부으면 간단하였을 것이지만, 가난한 산골짜기 교회, 돈 없는 목사로서는 그저 ‘꿈같은-’ 일이었고 오직 기도하면서 그때 막 48살이 된 몸뚱이 하나로 감당하리라 마음을 먹고 삽과 곡괭이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화단으로... 여기는 주차공간으로... 여기는 텃밭으로...” 우선 경계를 구분하여 땅바닥에 금을 그어 놓고는 바로 옆 개천가로 봉고차를 몰고 갑니다. 둑 변에 차를 세워 놓고는 천으로 들어가서는 한 번에 하나 밖에는 들 수 없는 정도의 돌들을 낑-낑- 들어다가 차에 실었습니다. 화단 경계석으로 쓰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새벽이면 나가서 한 번에 10~15개 정도씩 들어 나르기를 해가 지고 초저녁별이 뜨기까지 계속 하였습니다. 1년 이상 이어진 ‘올-인’한 이 작업에서 저는 개울 돌 짝 밭에 두 번 기절하여 쓰러졌습니다.
갑자기 앞이 아득해지면서 몸이 휘청하고는 쓰러지던 것과 그렇게 쓰러지면서 마음속으로 ‘아, 내가 여기서 이렇게 쓰러지게 되면... 집사람이 알아야 하는데- 어-어-’ 하면서 쓰러졌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나 보니 다행스럽고 또 감사하게도 1시간 정도가 흘렀을 뿐이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다시 주섬주섬 일어나서 돌들을 챙겨 가지고 차를 몰고 교회로 들어오니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가 시원한 얼음냉수를 챙겨 들고 나오면서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는데 왜 그렇게 예쁘고 반갑던지-!!
그렇게 나른 돌들로 교회 울타리 경계와 화단 경계석으로 쪼롬하게 놓았는데 나중에 대충 헤아려 보니 천 여 개나 되었습니다.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그 돌들을 볼 때마다 중얼거리게 됩니다. “그래 저 돌들 하나하나마다 나의 땀이 최소한 두 방울씩은 떨어진 것들이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은 위험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마당을 가꾸는 중에 어찌어찌 영락교회 선교지원부에 연결이 되어서 당시 천 만 원 이상을 지원해 주어서 교회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두툼한 샌드위치 판넬로 교체하고 그 위에 초록 슁글을 덮었습니다. 이제는 빨간 벽돌 초록 지붕으로 탈바꿈하여 그야말로 산골마을 ‘예쁜 전원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 그때의 감격이란-!!
이제는 비오는 날에도 비가 새는 걱정이 없어졌고 깔끔해진 마당에 그야 말로 ‘미친 듯이-’ 꽃을 심었는데 그 결과 ‘방주 꽃동산’이 되어 이제는 지나가시던 마을 주민들도 자주 들어와서 둘러보시곤 하면서 “목사님, 참 대단하시네요. 목사님 덕에 이제는 마을이 환해 졌습니다.”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그때마다 저는 겸손한 척 “에이... 뭘요 다 마을 분들 덕분이지요.”라고는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너무나 뿌듯하면서 아하 그래, 이게 바로 ‘칭찬 듣는 교회’의 모습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또 그만한 일을 감당 할 수 있게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꽃 마음을 가꾸는 방주교회”라는 명제를 교회 타이틀로 정하고 열심히 꽃밭을 가꾼 결과 지금은 봄 여름 가을... 때마다 풍성히 피어나는 꽃들로 인하여 ‘꽃 많은 교회’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특히 행락 철이 되면 지나가던 이들이 일부러 들어와서 꽃과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보면 저 역시 즐겁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교회다운-’외관의 기초를 놓는 것은 크게 힘을 쓰고 공을 들인 이유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그 발걸음을 교회로 옮기게 하는 동기부여의 초석을 놓는 것으로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웃을 방문하는 전도자는 깨끗하고 깔끔한 모습이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으로 마을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좋은 인상과 이미지를 주어 그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을까... 전도지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보다 앞서 ‘새로 온 목사’가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칭찬 듣고 신뢰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시작한 것은 ‘음악교실’입니다. 이곳은 산골 외진 곳이라서 아이들이 음악과 악기를 접하기 쉽지 않기에 피아노를 하는 아내와 제가 이곳 아이들을 모아서 ‘방주음악교실’을 진행하였습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롯 등을 가르쳤습니다. 안양 청암교회 부목사 시절에 바이올린 첼로 완전 초보자들을 모아 2년가량 가르쳐서 ‘쉴하쉬림’이라는 찬양 앙상블 팀을 만들어 여러 지방의 크고 작은 교회들과 순복음기도원 등 그리고 여러 사회봉사 단체와 시설들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였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문이 나자 우리 교회에 아이들을 보내 음악교육을 받게 하는 가정들이 늘어났으며 급기야는 이곳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음악교육을 담당하고 지도해 달라고 하는 요청이 있어서 일주일에 두 번 ‘방과 후 교사’로 4년 정도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주로 하여 매년 10월 중에 ‘방주교회 산골음악회’를 개최하여 10회를 넘겼습니다. 덕분에 한 번도 교회에 나와 보지 않던 주민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서로 인사하며 즐거워하는 시간들을 갖게 된 것도 전도에 한 몫을 하였습니다.
산골마을에서는 ‘안보는 듯 바라보는-’ 눈들이 사방에 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제가 하는 일, 끙끙거리며 화단을 만들고, 개천에서 돌멩이 들을 나르는 일, 마을 상점에서 무엇 무엇을 사간 일 그리고 심지어는 지치고 힘들어서 마당 가운데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던 모습들까지도 다 보고 또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러한 말을 전해 들었을 때에 등줄기가 서늘해지기는 하였습니다만, 한 편으로는- “그래 주민들이 날 바라보고 있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잖아- 좀 더 부지런하고 신뢰 받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말이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세수 하고 밖에 나오기만 하면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반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도 목회자에게는 유익한 것이 분명합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삽질과 곡괭이질... 쥐들과의 난투... 아내와 어린 두 딸들을 거느린 가난한 목사는 오직 기도하는 것 밖에는 달리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양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목사님은 대리운전을 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야, 참 힘든 것이 목회, 그 중에서도 시골 목회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어깨에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힘이 생기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이렇듯 달리 피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 비슷한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여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여기 나와 함께 계셔... 오직 정직과 순전함을 잃지 말자, 정직과 순전... 욥과 같이...”
이제 산골목회 13년을 넘어서고 있으며 그 동안에 성도들도 많이(?) 늘어서 주일에는 통상 50명 많게는 60명 정도가 함께 예배하며 남전도회와 여전도회가 조직되고 구역도 4개 구역으로 나누졌습니다. 교회의 좌석 수가 60명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형편이라 양쪽 복도에 보조의자를 10여개를 마련하여 놓았습니다. 그렇게- 이제는 “꽉 차는 교회”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일부 집사님들 사이에서는 건축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곤 합니다만, 저는 ‘큰 교회’ 보다는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지라 서두르지 않고 있습니다. 더 성도들이 많아지면 2부 예배를 드리면 되고...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으시다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또 저를 통하지 않으시더라도 언젠가 누가 지어도 짓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례비... 그래서 우리 가족의 총재산이었던 전세금 천만원 정도를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생활을 한 것도 이제는 돌이켜 보며 허허 웃게 되는 ‘신앙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지만, 지난13여년의 ‘산마을 목회 체험’으로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새삼 더욱 선명히 알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소득이 없습니다.
“...나는 목회에만 전념 할테니... 나에게 쌀 떨어졌다, 돈 떨어졌다 하지 마시오... 사례비는 정해진 것이니 그것으로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봐요...”
돈에 시달리는 것으로 목회가 지장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는 핑계로-) 사역 초기에 가만히 아내를 불러 놓고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말이기도 하고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종하였지만, 가끔씩 숨길 수 없는 것으로 길게 내어 쉬는 한숨의 작은 소리가 그 모든 사정을 대변하여 주었고-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저의 마음을 ‘쥐어뜯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 만약 우리 네 식구가 너무나도 궁핍하여 거리에 나가 앉게 된다면 저는 목회를 그만 두고 리어카라도 끌겠습니다. 한 교회의 목회자는 다른 분이 오시면 될 것이지만 한 가정의 가장은 그렇게 바꾸어져도 괜찮은 구조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 제발 그렇게는 되지 않게 하여 주세요...”
그렇게 목회하고 그렇게 설교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심방하였습니다. 손에 쥐고 있었던 전세금도 다 까먹어 갈 무렵... 아내는 여전히 아이들의 학비 문제 등으로 은행과 보험회사를 들락거렸는데 하나 둘씩 증가 하던 성도들이 어느덧 한 20명쯤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가 꽉 차는-’ 6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목회자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올라서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고 ‘건강한 교회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떠오르는 이름들... 전임 양주완 목사님 평북노회 황수석목사님, 김원춘목사님, 김경호 목사님, 영락교회 문희원 목사님과 선교부 그리고 저와는 신학동기인 강원노회 함재흥 목사님 등 기도하며 도와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용히... 사는 것이 가장 복 된 것이지요.”
제가 늘 하곤 하는 말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그 중에는 ‘별의 별’일들도 상당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은 서로의 욕심들이 충돌하면서 여러 가지로 ‘다툼의 모양’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면서 살아가기에도 너무나도 짧은 사람의 날들인 것에 생각이 미치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참으로 아침안개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는데...
성경에서 지적하는 여러 가지 ‘헛됨’ 중에서도 앞줄에 서있는 것이 ‘다툼’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헛된 물거품과 같은 것들을 추구하며 지낼 것이 아니라 이후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칭찬 듣고 상급 받을 수 있는 ‘열매의 날-’ 곧 찬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날들을 오늘도 꿈꾸고 소망하면서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동터오는 동녘하늘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장성하여 직장인이 된 큰 딸아이, 대학생이 된 둘째 딸... 그리고 묵묵히 순종하며 목회를 돕고 남편을 섬겨준 아내를 볼 때마다 우리 네 식구가 헤쳐 온 지난날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마음속에서 돌아갑니다.
“아이들아 잘 버텨주어 고맙다. 그리고 마누라, 잘 견뎌주고 잘 도와주었소...”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지만, 그래도 우리 네 식구가 가끔은 날을 정하여 우르르 몰려 나가서 ‘짜장면이나 칼국수나 혹은 돈까스-’를 먹으며 콩콩 서로 이마를 맞대고 즐거워 할 정도의 형편이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교회의 건강함과 가정의 화목함 곧 아이들의 명랑함, 그리고 하나님이 때마다 내려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은혜 가운데 지난 모든 ‘숨 가빴던-’ 날들의 고비들을 이렇듯 쓰러지지 아니하고 넘어오고 지나오게 되었으니 돌아보면 또한 감사할 것뿐이며- 장차를 믿음으로 내다 볼 때에도 역시 감사할 것뿐입니다.
이제 환갑의 나이... 앞으로 10년 즈음의 ‘목회현역’의 날들을 다 지내고 은퇴의 날이 되기까지- 무엇보다도 ‘요동하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 그렇게 붙잡아 주시고 또 만들어 주시옵소서-”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