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와 간구(懇求)
기도(祈禱)와 간구(懇求)는 그 내용과 목적의 상당 부분이 서로 맞물려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기초하여 그 둘의 관계를 가만히 상고(相考)하여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명확히 서로 구분되어져야 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기도와 간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그 기도와 간구 고유의 순수함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어떠한 이유와 형태로든지 ‘순수함’이 배제되어진 기도와 간구는 그 ‘막연한 혼합’의 탁한 모양으로서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선명함으로 나아 갈 수 없고- 그것은 마치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기에 목적하는 바에 다다를 수 없는 항해와도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祈禱)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에게 빎” 또는 “신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빎’은 곧 ‘구하다’ ‘간청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간구(懇求)라는 말은 “간절히 바라서 이루어지기를 빌고 또 간청(懇請)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기도와 간구를 거의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 보면 성도들의 기도는 온통 ‘간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기도모양은 사라지고 그냥 ‘요청이며 읍소(泣訴)’가 되어버렸습니다. 기도 속에 간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간구의 두 바퀴로 기도가 이용되어지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무엇이든 거기에 정해진 용도대로 알맞게 사용되어질 때에만 그 순기능이 살아나고 유익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적합지 않게 사용되어질 때는 역기능이 살아나고 그래서 다치고 해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작금의 성도들 다수의 기도 모양들을 보면, ‘순기능’은 희석되어지고 그 ‘역기능’만이 점점 더 크게 살아나고 대두되고 있는 모양으로서 여기에서 비롯되는 부작용 또한 만만찮게 생겨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안고 품고 있는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의 기도가 나에게 과연 득(得)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기도자의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곧 어떠한 모양으로 무엇을 놓고 어떻게 기도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간과되어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사람의 한계와 나의 능력의 제한이 분명하여 도저히 이루어내지 못할 그 어떤 문제가 자신 앞을 가로 지르며 놓여 질 때에 간절히 기도들을 합니다. 나보다 능력 있으신 이,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 천지 만물을 지으신 전능자- 그래서 나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이 는 곧 하나님뿐이시라는 확신으로서의 믿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나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선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내가 왜 기도하는가?”하는 것을 지혜롭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곧 기도의 본질문제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떠하여야 합니까?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기도는 먼저 찬양이며 예배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기도는 그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 곧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에 대한 내 마음의 확신, 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더 나아가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며 또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복하는 모양이 아닐 수 없기에 찬양의 모습이 되는 것인데 바로 예배(禮拜)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禮)를 갖추어 배(拜) 즉 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형식이나 의전이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예(禮)를 갖추어 절(拜)하는 것 바로 경배이며 찬양입니다. 따라서 기도 역시 예배의 한 줄기이며 모양이라고 하는 정의가 틀릴 수 없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어야 하며 여기에는 ‘정직과 순전’으로 아름답게 버무려진 ‘경건’의 모양이 요구되어집니다. 오직 ‘나의 필요한 것만을 갈급해 하며 구하는-’ 모습만으로는 찬양과 예배가 요구하는 모양에 많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그저 ‘무엇인가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대로 어린아이의 모습이 선한 것이며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린 아이일 때’에만 해당됩니다. 육신이 그렇듯이 우리들의 영혼도 신앙도 믿음도 마냥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며 어린아이의 순전한 모습을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것이지만, 그것이 성숙으로 나가는 믿음의 모습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몸이 성장하는 것 같이, 마음도 믿음도 성장하여야 합니다. 그 성장의 모습이 부모를 기쁘게 하여 주는 것처럼 우리들이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성장 모습은 찬양의 삶, 예배의 모습, 기도의 모양으로 증명되어집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예배하고 있는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돌아 볼 때에 한숨을 쉬거나 고개를 떨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무엇인가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귀하고 좋은 일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나의 ‘기도’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귀한 예배의 모양으로 드려지고 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짐하는 믿음이며 회개하는 마음이고 관용하며 용서로 품는 마음이 먼저 ‘기도의 기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필요한 것만을 소리치며 부르짖는 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가 되는 것이 우선이며 바로 ‘참 된 예배’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당면 사정에 대한 안타까움의 역설과 간청보다는 내 모습 전체로 드려지는 예배의 모양이 우선되어질 때에 하나님은 손 내밀어 붙잡아 주십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