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철학자이자 신학자이었던 키엘케골(이하 케골)의 유명 명제를 차용하여 미안합니다만, 어쩌면 오히려 그에게 보내는 오마주의 한 모양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모르긴 해도 표절이나 저작권문제에 휘말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허허.
바짝 마른 스폰지처럼 다양한 지식과 철학의 관점들에 목말라 마구 잡이로 섭렵하려하던 저의 장년 초입 즈음에 상당한 영향을 준 이 책의 작가 케골은 내용에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절망’으로 진단하였습니다. 어떠한 절망일까... 그렇습니다. 모든 형태의 절망입니다. 절망이란 ‘반전이 있을 수 없는 불안의 끝’입니다. 그리고 절망이란 불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불안이라는 마차를 타고 절망의 고지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왜 불안합니까? 두려움, 염려, 근심... 등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불안의 요인과 원인으로서는 ‘의심’을 듭니다. 즉, 사람은 의심으로 불안해지는 것이지요.
케골 역시 절망에 이르게 하는 줄기 중의 하나로서 불안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저와 같은 범인(凡人)이 그의 방대한 철학 및 신학 사상을 어쭙잖게 들여다보면서 마치 큰 고목나무의 저 끝 쪽에서 팔랑거리는 작은 잎사귀 한 잎 같은 것만을 바라보는 수준을 넘지 못하는 모양이 여전한 것이기에 저의 염통 근처에서는 계속 ‘너 자신을 알라.’는 각성과 자중의 촉구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몇 자 적기에 이른 것은 지난 20년 동안 목사로서 파악하게 된 바- 의심이라는 ‘악한 생물’을 물리치고 또 누구나 다들 물리쳐야 누구나의 것 같지만 결코 아무나의 것이 될 수 없는 ‘삶’그 자체를 획득하고 확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최근에 더욱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희망도 소망도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고 또 거기에 어떤 실제적인 상황이 더욱 닥치든지 또는 그냥 그 상태의 계속이든지 간에- 절망이란 더 이상 작금의 ‘호흡’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상태이며 상황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절망이고 그래서 ‘절망자’는 자살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절망을 완성’하지요. 자살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어떤 실낱같은 것으로라도 ‘소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목숨이 끊어지는 과정의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실천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 그 ‘용기 없음’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절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갖게는 되었지만,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진리인- 옛 어르신들의 말씀대로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을 상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 팔자’를 말하는 운명론으로서가 아니라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무능의 존재’에 기초합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내일 일’에 대하여서 예상을 하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또한 ‘누구를 막론하고-’ 전혀 틀림이 없는 ‘내일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이니까...”는 말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비비안 리’가 하였던 말로 유명합니다. 물론 작가의 말이며 생각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참으로 멋지고 희망찬 말이 분명합니다. ‘절망의 태양’은 지고 ‘희망의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생각을 가진 이의 세상을 향한 자세에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기에 낙담으로 주저앉지 아니하는 용자(勇子)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라는 명제는 진리이며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 일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듯 ‘죽는다’는 것은 절망이지만 그렇게 분명히 ‘죽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참 이상한 일이지요. 절망으로 낙담으로 한숨을 쉬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철인 세네카는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는 말을 하였습니다. 분명 어느 시점에서는 ‘절망’에 이를 것이지만 절망자의 모습으로는 살아가고 있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조금 더 세네카를 언급하자면- 그는 로마 제정시절의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이며 정치가였고 폭군으로 유명했던 ‘네로’의 청년시절 스승이기도 하였으며 성경 속 사도 바울과도 서신을 주고받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결국 폭군 네로황제에 의해서 자신과 형제들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지만, 인간윤리를 가장 중시하며 또한 인간은 소우주(小宇宙)이고 그 본질은 로고스인데 이것은 우주의 본질인 로고스와 동일한 것이므로 사변하는 이성(理性)에 따른 생활은 우주와 합한, 합하여지는 생활이 되며, 이것이 자연 진리에 따르는 생활이고 사물의 파악자 이자 지혜로운 추구자인 현자의 생활이라고 간파한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도 스토아학파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핵심줄기를 쥐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사상의 저변에는 ‘그러므로 인간에게 절망이란 용납될 수 없는-’ 절망이란 과장된 사변(思辨)이자 헛된 사유(思惟)에서 나오는 사악한 결과로서 불행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이 사상은 유일신 여호와의 기독교 메시아사상에는 부합될 수 없어서 교회들의 배척은 받았지만, 심도 있게 사유 되어야 할 ‘인간사상’의 윤리와 우주적 관점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과, 사람이 나아가야 할 향방을 선험적으로 보여주는 인간강령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후 2천년 뒤에- 다 같은 실존주의 철학 노선을 걷기는 하였지만, 관점만큼은 전혀 달랐던 하이덱거와 야스퍼스가 함께 고민하여야 할 영혼의 고지를 앞서 제시하고 보여주었습니다.
글의 전개가 서툴러 다소 장황하여 졌기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어떤 사람에 대하여, 어떤 상황에 대하여- 막연한 의심을 품을 때에 그 사람은 불행해지는데 곧 의심은 불안을 낳고 스스로는 절대로 물리치지 못하는 불안은 모든 희망과 소망을 짓누르는 압제와 압박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오직 정하여진 불멸의 노선 절망으로 치달으면서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절망의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이란 한 번의 소유만으로도 곧 백년의 습관처럼 몸과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의심을 풀게 하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추어졌던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규명되었다.”라고는 하게 되었더라도, 그것으로 의심의 대못을 빼어질 수는 있지만 그 대못의 자국만큼은 거짓말처럼 지워낼 수는 결코 없는 정죄의 속성을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영혼의 족쇄로 남겨 놓고 언제라도 더욱 조여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아무 것으로도 ‘불안해하지 않는-’ 훈련을 거듭하여야 합니다. 이 훈련의 첫 동작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의심했던 모양이 명약관화한 사실로 드러난다고 하여도 그것을 잊어버리는 훈련을 땀 흘려 계속하여 내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의심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아니하며 또 다른 의심들을 불나방처럼 불러들이는 ‘정죄의 횃불’이 되어버리고 결국에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을 활활 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몸도 영혼도 절망의 완성-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하여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곧 ‘요동치 아니하는 믿음’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