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룰 수 없는 일
“... 다 소용없어, 사람이 나이 들어 70대가 되면 뭘로 구분하는지 알아? 여자? 남자? 학식? 건강? 다 필요 없고 오직 ‘돈’이야. 돈이 있느냐 없느냐 오직 그것으로만 구분이 되는 뒷전 인생이 되는 거지... 80대? 그야, 더 간단하지, 죽은 인간이냐 산 사람이냐 로만 구분되어지는 거잖아...”
마을에 상(喪)이 나서 상갓집 빈소에 조문을 갔다가 잠시 자리에 앉았는데 역시 조문객으로 보이는 오십대 정도의 남자 네 명이 옆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하는 말들 중에서 한 구절을 가감(加減) 없이 옮긴 것입니다. 술김에 나오는 취중연설(醉中演說)인지 인생에 대한 자조(自嘲)인지, 형편에 대한 푸념인지, 아니면 상갓집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돌려보려는 유머인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막아내지 못하고 귀에 담게 된 그 말속에는 휴- 깊은 한숨을 쉬게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날로 고령화되어가는 현대사회 사람들의 수명이 이제는 보통으로 칠십 팔십을 넘어서게 되면서 사회의 인식도 변화하여 나이 구십쯤은 향유(享有)하셨어야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막 환갑에 턱걸이한 저 같은 사람은 감히 ‘연세’라는 말은 물론 나이의 ‘나’ 자도 꺼낼 수 없게 되었지요. 한 반세기 전 만 하여도 환갑이 되면 ‘나이 드신 어르신’으로 대접을 하여주곤 하였는데- 이제는 정부에서도 65세가 되어야 어르신 취급을 하여주며 이름 하여 ‘노령혜택’을 주기 시작하더니만- 다시 70세로 상향조정을 하려는 듯 여론 추이의 수집용 애드벌룬이 솔솔 띄어지고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장수(長壽)’를 원하는 만큼 고령화사회(高齡化社會)가 된다고 하는 것은 장수의 현실이 다가오는 것이니만큼 나쁠 것이 없고 오히려 드디어 장수시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기뻐하며 복(福)으로 받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지던 것이 불과 20~30년 전까지도 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축복의 고령’ 당사자가 되는 이들도 입을 내밀고 불만스러움으로 멀찐하게 서 있는 모습에 다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령사회’의 문제점이 하나 둘씩 제기되고 사회적 현실 문제로 대두되기를 몇 차례 거듭 하더니만 급기야는 ‘골치 아픈 사회 문제’라는 이름을 갖게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핵심문제와 사항은 바로 ‘돈’입니다. 우리 사회가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는 고령자들의 노후생활을 위하여 젊은이들에게 더욱 큰 생산의 짐이 떠안기는 구조가 되었는데 그저 구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을 무거운 짐으로 떠안겨 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상기한 대화 속에서도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처럼 이제는 “늙어서 돈이 없으면 살아있는 시체다.” “죽기 전까지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돈이 효자다.”라는 등의 말들이 고령자들이 끝까지 붙잡고 잊지 말아야 할 불문율이 되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그렇게도 원하고 또 원하는 장수(長壽)의 모양이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자식들에게 짐이 안 되려면 장수(長壽)만으로는 안 되고 건강장수(健康長壽)이어야 하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또한 아무리 건강하여도 일단은 ‘건강한 늙은이’를 세워주는 생산의 자리와 현장이 없기 때문에 상황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공짜지하철을 타고 배회하고 방황하는 고령자들이 자꾸만 더욱 양산되고 있는 것이지요. ‘즐거운 노후’입니까? ‘눈총 받는 노후’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심화 되어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정부는 일찌감치 그럴 수밖에 없는 ‘정당한 돈타령’을 하고 있고 고령자를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도 현실의 애로는 역시 ‘돈’입니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효(孝)의 도(道)를 외치며 교육하는 우리 사회이지만 효부상(孝婦賞) 제정과 수여 같은 수준의 것만으로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적 ‘곤난대세(困難大勢)’를 잡을 수 없기에 이 작금의 시점에서 우리가 두려워하여야 할 일은 경제적위기(經濟的危機)보다는 오히려 ‘윤리적위기(倫理的危機)’입니다. 윤리가 없는 경제의 부흥은 곧 인간성(人間性)의 말살(抹殺)로 더욱 치닫게 하는 기름부음 밖에는 아무런 역할도 되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대국(經濟大國)과 경제선진화를 꿈꾸듯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박차를 가하여야 할 일은 ‘풍성하게 사는 일’이 아니라 ‘화목하게 사는 일’입니다. “육선(肉饍)이 가득하고 불화하는 것보다는 마른 떡 하나를 놓고도 화목 하는 것이 나으니라.”는 말은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물리치는 일도 매우 중요하고 북한의 위협에 ‘맞대응 미사일’을 개발하고 배치하는 것도 분명히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삶의 근본이 되는 - ‘인륜(人倫)을 잃지 않고-’ 사는 일입니다.
장수(長壽)도 좋고 건강장수(健康長壽)는 더욱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더욱 좋고 가장 좋은 것은 화목장수(和睦長壽)입니다. 가정이든 국가이든 그 중심을 흐르는 주맥(主脈)은 ‘평안의 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 기름진 것을 가지고도 좌불안석(坐不安席)하게 되는 것은 그 마음에 평안(平安)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평안은 화목(和睦)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화목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存在)의 자각(自覺)과 그 목적의 바른 이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령이 위협하는 사회와 국가의 안녕(安寧)과 가정의 화목을 연구하는데 열심을 더하고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지금 우리들의 발등 바로 위까지 바짝 다가온 ‘고령불화시대(高齡不和時代)의 엄습을 막아냅시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