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주는 ‘바다’
“받아, 받아, 다 받아 줘.”
라고 바닷물들은 서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지구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넓고 깊은 바다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받아 줍니다. 이 곳 강원도 골짜기를 흐르는 계곡 물도,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강물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과 심지어는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도 땅으로 스며들어야 할 것 외에는 모두가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렇듯 아무 것도 거부 하지 않고 ‘받아 주는-’ 모습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이름도 ‘받아’라고 하였고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서 ‘바다’라고 쓴다는 어떤 이의 위트 넘치는 표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하고 영어권 쪽으로 딴죽을 걸어보자면, 영어로는 바다를 씨(sea)라고 하는데 혹시 그 서양 쪽에서는 “씨-씨-” 하면서 외면하고 받아주지 않는 바다도 있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닐까요? 허허 (휭- 썰렁 개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바다의 모양 자체에 여러 의미를 더하고 또 많은 것을 찾아서 배우고 있습니다. 누구나 ‘바다 같이 깊고 넓은 마음’ 들을 가질 것을 어렸을 적부터 종용 받아 왔습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식의 많음이 꼭 마음을 ‘큰마음’의 모양으로 넓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금의 시대에 ‘지식이 많은-’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시냇물도, 강물도 바다로 들어가면 ‘바닷물’이 됩니다. 바다 안에서는 물들의 구분과 나뉨이 없어지기에 빗물, 우물물, 목욕물, 쌀 씻은 물, 세수한 물과 흙탕물 심지어는 오줌물 똥물까지도 서로의 우열을 외치는 차별이 없습니다. 바다라고 하는 큰 그릇 안에서 모두가 하나로 동화(同化)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 어른 들은 훌륭한 인품의 인물을 일컬어 ‘바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정화시켜주는 그릇됨의 역할을 높이 기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 세상에 바다와도 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기에 ‘세상의 오염’은 이렇듯 날로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갈등, 미움, 원망, 시기 들이 자라나서 결국에는 다툼과 싸움과 분쟁 그리고 전쟁으로 나아는 모습들입니다. 날마다 서로 때리고 죽임으로 흘리는 핏물들의 흐름이 계속되고 - 그 역시 바닷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빗물로 씻기어진 핏물은 바닷물 가운데서 정화가 되겠지만, 사람의 귀한 생명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고 절망이며 비극이지요.
인류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고(至高)의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과연 바다와도 같은 크고 깊은 말씀이지만 그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이겠지요. 원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분명히 아닙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그것은 바로 ‘나’라고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것은 바로 ‘저 사람’이라고 만인에게 주목 받고 추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쯧-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 또한 결코 바다처럼 크고 바닷물처럼 많아 보이는 모습과는 상관없이 깊고 깊은 산골짜기 어느 계곡 속의 한 줄기 실개천처럼 아무도 알지도 찾지도 못하는 곳에서 졸졸졸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만도 슬픈 일이 분명합니다.
“아-! 정말 시원하고 물 맛 좋다-!!”
하고 사람들은 그렇듯 어쩌다 만난 깊은 계곡 속에서 샘을 이루거나 가늘게 흐르는 물을 떠 마시며 흡족해하고 즐거워합니다. 사람도 그러한 이들이 우리들 속에 많았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러나 역시 그 물처럼 사람들에게 고고의 ‘청량함-’을 줄 수 있는 사람 역시 ‘깊고도 깊은-’ 그 어디에선가만 어렵게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혹 이웃에 또는 주변에 ‘바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혹 아무리 찾아도 없다면- 한숨을 쉬며 낙담하지 말고 바로 당신이 그 중에서 바다와 같은 사람이 되시면 당신의 이웃에 주변에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일 훌륭한 일을 찾지만 이 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모든 가정과 이웃과 사회와 국가는 ‘바다 같은-’ 사람이 필요하고 그러기에 그 고대함은 고래로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다립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큰 바위 얼굴’에서 그 얼굴의 출현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극중 주인공 어니스트는 어릴 적부터 평생을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다가 자신이 그 얼굴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렇듯 길고 긴 기다림 속에 목말라 하던 그의 앞에 바로 ‘이 사람’하고 세워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어니스트 자신을 ‘그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길이 없다면 만들며 가면 된다”라는 말처럼 우리 주변에 ‘바다와 같은’ 사람이 없다면 내가 그렇게 되면 될 것입니다.
자- 우리 모두 한 번 도전해 보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 사회에서 바다처럼 받고 품어주는 사람이 되어 지는 것 말입니다. 만일 힘쓰고 애써도 바다와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다라고 하여도 결코 실패일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사람’의 모습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바다와 같은 ‘모양’은 아니더라도 그 ‘역할’에 있어서는 ‘바다 같은 사람’이 되어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쁨과 평안이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