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영화
‘좀비’(Zombi) 라는 말은 괴기스런 공포영화를 통하여서 일반에 널리 알려진 단어입니다. 어원적으로 좀비는 콩고 단어 잠비(Nzambi, 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은 ‘살아있는 시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그 근원은 옛날 서(西) 아프리카에서 서인도로 노예로 잡혀온 흑인들이 가지고 온 ‘정령숭배’ 사상에 의해서 시작되고 지금도 아이티 등지에서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부두(Voodoo)교’이며 부두교는 자연과 인간사의 여러 수호 정령들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좀비는 이 부두교의 사제인 보커(bokor)가 인간에게서 영혼을 뽑아낸 존재라는 설명도 있고 무거운 죄를 지은 인간이 그 형벌로 좀비가 된다는 전래도 있습니다.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시체들이 살아 움직이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설정이 대부분이지만, 원래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서 시체들에게 잠시 움직일 수 있도록 영령이 불어넣어진 것이라는- 작금의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조금은 황당한 설명도 전해져 오고 또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 정착한 부두교가 미국인들에게 좀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지금의 상상을 키워주었다는 혹자의 주장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좀비 영화의 시작은 1931년 당시 흡혈귀 배우로 유명세를 떨쳤던 ‘벨라
루고시’의 <화이트좀비>가 그 시작이며 이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허리우드에서만도 수백 여 편의 좀비영화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좀비의
모양도 진화(?)를 거듭하면서 좀비에게 ‘드라큘라’식의 설정이 겹쳐지고 그래서 좀비에게 물린 사람이 또 다른 좀비가 되어 마구잡이로 일반
시민들을 공격하는 ‘좀비의 전염시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시체가 살아나서 사람들을 공격 한다’는 너무나도 만화 같은 유치한 설정도 그렇고 또 과연 킬링타임용으로라도 볼만하다고 하는 좀비영화의 수작으로 세인의 입에 오른 내린 영화도 없었고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극장에서 좀비영화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TV화면 속에서 예고편으로 몇 장면 보여 진 ‘월드 워Z’라는 영화가 조금은 특이한 것 같아서 영화자료사이트에서 다운을 받아 보았습니다. ‘브래트 피트’ 가 주인공으로 분하여 공격해 오는 좀비들로부터 가족을 지키려는 힘겨운 싸움의 장면들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역시 영화 자체는 B급 괴기액션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지만, 몇 가지 눈길을 끄는 장면들이 있는데 우선은 좀비들이 ‘무더기’를 이루어 서로를 마구 짓밟아가며 높은 방호벽을 거침없이 기어 올라가는 장면 등인데 특수효과의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좀비들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잘 주체하지 못하여 삐거덕 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우사인 볼트’ 보다도 더 빠르게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조금은 남다르게 느껴져서 제가 주목한 것은- 영화 속의 좀비들의 ‘광란의 모습’과 그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좀비떼거리’가 무더기로 몰려 뛰어 다니면서 아무런 것에도 지장 받지 않고 또 무엇이라도 장애가 되어 멈추거나 하지 않고 쓰러지고 서로 밟고 또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오직 상대방을 물어뜯기 위한 광란의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은 보는 이를 전율케 하는 것으로서 과연 ‘미쳐 날뛴다’라는 모양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이겠지요. 멀쩡한 사람이 어떤 것을 계기로 ‘제 정신’을 잃어버린 좀비가 되어 그렇듯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면서 긴-한숨을 쉬게 됩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세상에 일어나게 될 모양을 앞당겨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좀비의 형태이든 흡혈귀의 형태이든 또는 세뇌를 당했거나 혹은 SF 영화 속의 흔한 모양들의 로봇들처럼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오직 ‘자신과 다른 이들’을 적으로 지정하고 공격하기를 자신이 죽기까지 광란과 발광의 모습으로 계속하는 모양들은 성경 속에서도 묵시적으로 예언되고 있는 터입니다.
곧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마귀의 유혹과 미혹에 넘어가서 그 심령이 ‘물어 뜯김’을 당한 자들, 그래서 그 몸에 ‘악마의 표시’를 가진 자들이 그렇지 않고 믿음을 지킨 자들을 향하여서 해하려고 죽이려고 자신들과 같이 만들어 놓으려고 광란의 질주로 공격을 하는 장면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릅니다. 산속이든 바다 속이든 공중이든 불속이라도 개의치 않고 쫓아와서 물어뜯으며 함께 죽으려는 자들- 의 모습을 요한 계시록 등을 근거와 기초로 하여 상상하여 보는 모습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신학자들 마다, 목회자들 마다 해석이 다르고 그래서 ‘말세의 모양’을 놓고 서로 반목하기를 거듭하기도 하고 있는 모습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저 역시 한 가지만큼은- 긴 한숨을 쉬면서 동의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정하신 말세의 때에는 상기한 영화 속 장면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광란의 모습’들이 펼쳐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겠지요. 정해진 장차의 일들을 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너무나도 안타까우셔서 그러셨겠지요.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준비하되 그때가 ‘추운 겨울’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마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마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마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막13:18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막13:19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즉, 끝 날에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덜하여지기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정하신 날이 언제일지는 우리들이 알 수 없지만, 세상이 점점 더 선하고 착하여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에는 누구라도 동의 할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모든 ‘악한 모양’들의 미혹과 근접을 물리치는 ‘승리와 구원’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4-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