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살아요.
오래 된 복음성가 중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찬양노래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하는 노랫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저는 심기가 불편하였습니다. 가사 내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루하루 산다고 하는 것일까? 더욱이 날마다의 날들을 소망 중에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 된 이들은 그러한 ‘하루살이’ 모양으로 자신에게 주어지고 이어지는 소중한 날들을 그렇듯 소진하는 모양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나중에 그 가사가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만끽하며 하루하루를 기쁨 중에 살아간다’ 고 하는 내용임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지만- 요즈음 같아서는 정말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하는 말이 은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또 다른 체감의 온도가 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기쁨 중에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불안함으로, 조마조마함으로, 염려함으로 그리고 마음 속 무거운 근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연명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점점 더 그 흥왕함을 더해 가고 있는 극악한 각종 범죄들의 거침없는 횡행 때문입니다. 어떤 기사의 제목이 “불안해서 못 살겠다. 거리에선 성폭행, 군대에선 구타사망”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오늘 날 이 사회의 불안 심리를 잘 대변하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죽고 죽이는 사건사고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그 역사가 바로 내 앞에서 펼쳐지고 그 대상과 피해자가 나와 우리 가족 내 자녀들이 되어 지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잘 못하여 죄 지은 것이 있고 그것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안’과 친구 되어 살아야 하겠지만, 아무런 잘 못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평이한 사람들이 악한 이들이 대상으로 삼는 ‘불특정 다수’ 가운데 끼어져서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현실은 매우 우울하고 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빨리 대책을 세우라고 위정자들을 닦달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책무로 감당하는 가장 앞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답답하고 암담하고 그래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임이 분명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들은 물론 지역의원들과 동네 면장 이장 자리를 놓고도 온갖 공약들이 난무하고 그 중에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가 ‘안심하고 사는-’이라는 말입니다. 안심하고 농사짓고, 안심하고 회사 다니고 안심하고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안심하고 저축하며 안심하고 장차의 계획을 세우게 하여 주겠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공약(公約)의 공약(空約)됨을 나무라던 이들 조차도 지쳐 버려서 그 공약의 공약됨을 당연히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외면해버리는 모양들입니다.
사회의 법이, 정치가, 공권력이 그리고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의 도덕과 윤리가 또한 이에서 비롯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모든 질서가 잘 맞물려지고 기름이 발라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니 이미 그렇게 되지 않기에 이렇듯 ‘불안의 날들’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지내게 된 것입니다.
벌써 반세기 전, “불안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라고 하는 표어가 골목마다 붙여져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간첩들의 자수를 권면 유도 종용하는 표어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새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때 그 간첩들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과 또한 내 주변에 누군가가 간첩일 수도 있다 라는 국민들의 불안감입니다. 곧 법을 어기고 있던 자들(간첩)의 불안과 법을 지키고 있던 이들(국민)들이 다 함께 가지게 되는 불안이 지금 우리들이 가지는 불안의 심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곧 불안(不安)이라는 글자 뜻 그대로 ‘나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생겨지는 마음의 근심입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근심은 함께 하였으니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하여 온 근심이라는 이웃이 만들어 주는 불안의 온갖 모양들을 일시에 퇴치시키는 묘안이라는 것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근심과 함께 다니기는 하되 근심을 짊어지고 다니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이른 대로 근심함으로 변화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날마다 ‘근심할 수밖에 없는 작고 능력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나의 현재 모습을 통하여서 이 세상사의 실존과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스스로 부풀리는 나의 모습을 통하여서는 아무 것도 알 수도 얻을 수도 없고 오직 겸손함으로 낮아지는 사람들만이 평안의 문을 찾고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벗겨 주시며, 근심과 불안에 떠는 이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지금-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당신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