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모양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병언일가와 추종자들의 국내 도피 행각들이 얼추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도망자의 끝이라... 사람들은 자신이 불리하여지면 도망을 합니다만 그러나 긴 호흡으로 돌아 볼 때- 어디로 도망을 하겠으며 어디에 안전한 도피처가 있겠습니까.
유씨는, 자기 혼자서는 들 수도 없는 여러 개의 무거운 현금 돈가방을 가지고 가야 했기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최측근들 몇 명을 데리고 이른 바 ‘황제도피’를 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산 속 외딴 곳 남의 집 매실 밭에서 돈도 측근도 없이 다만 썩어 백골이 드러나고 구더기가 온 몸을 덮은 채로 발견 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몸에 걸치고 있던 명품의 존재감과는 상관없이 ‘황제의 말로’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람의 욕심과 한계 그리고 돈과 권세의 무상함을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쯧- 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가 ‘세월호 참사’을 일으킨 모든 책임의 중심인물이라는 정죄함에 이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유씨는 ‘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낸- 불행한 사람’이며 또한 누구의 긍휼함도 불러내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워질 수 없는 피눈물의 아픔을 평생 끌어안고 응어리진 가슴으로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 것과 그 자신과 가족들의 삶 또한 풍비박산케 만든 주인공이 되어서 저렇듯 처참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다는 것으로 그렇습니다.
모든 범죄와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도피자들의 마지막 모습들은- 그토록 쫓았고 또 쫓겼던 양쪽 모두를 허망하게 하는 것으로 왕왕 결말 되어 집니다. 이번 사건도 그렇습니다. 검찰과 경찰의 전무(全無)하고도 후무(後無) 할- 우리나라 범죄사상 유래 없는 수사 인력이 동원되어 사력을 다하고 청와대 대통령으로부터 동네 반상회 주민들까지 온 나라가 검거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마음을 모아 움직였지만, 저렇듯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쫓기던 자의 말로를 보면서- 기다리던 ‘끝 모양’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고 기뻐 춤을 추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모두가 눈앞에 전개되어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아연하여지고 한숨을 쉬며 악몽을 꾼 듯한 얼굴들입니다. “모든 감추어진 것들 중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 고 한 성경 말씀처럼 감추고 숨었던 모양들이 결국에는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감추고 숨기기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그렇듯 백발이 된 즈음쯤에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아무리 잘 감추고 숨긴다고 하여도 끝내는 자신과 가족들의 가리지도 씻을 수도 없는 수치 중에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된다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혹 만에 하나 그야말로 ‘재수 좋게-’ 수십 년 꽁꽁 잘 숨겨졌다고 하더라도 아침 안개처럼 잠깐 있다가 스러지는 인생 중에 그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한 시각에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최면’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괜찮을 것이라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누구나 다 그렇다는 그리고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곧 안전할 것이라는 ‘안전 불감증’의 역설입니다. 괜찮을 거야... 그러나 괜찮은 것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물리쳐야할 마음의 소리는 바로 “괜찮을 거야.”입니다. 바램으로서 자기위로와 소망이라면 크게 잘 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내가 감추고 숨겨야 할- 많은 이들의 평안을 깨뜨리는 잘 못된 행보와 이에 대한 감춤을 불안을 잠재우려는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삶을 잡아매는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일 도피자의 말로를 보도하는 TV뉴스가 끝나니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한 개그맨의 “당황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끝-!!”하는 무슨 광고가 득의와 조소의 얼굴표정으로 이어집니다. ‘끝-!!’이라는 개그대사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일상에 일어나는 일들의 마름이 그렇듯 유쾌하고 깨끗한 모양이 되기를 바라는 동의적 심리에서 라고도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모든 과정 역시 끝의 모양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모든 인생들의 치달음 또한 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열심히 일을 하여도 또는 게을러 놀고먹어도 나이는 함께 들어가는 것처럼 ‘끝’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를 피해가지 않는 것이기에 나 ‘아무개의 끝’이라는 모양을 지금부터 잘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말씀하셨지요.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더 힘들고 중요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강 건너 불난 집 속 누군가의 일만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의 삶과 존재의 이유를 깨닫게 하는 ‘기식(氣息)의 명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휴--- 긴 한숨을 쉬어 봅니다. 언젠가 나이가 들고 백발이 되었을 때, 지치고 쫓기는 모습이 되어 남의 집 매실 밭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누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만큼 만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마른 침을 삼켜 봅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4-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