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과 미자립의 눈물
“교회성장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개척할 당시의 교인 수는 목회자 가족을 포함해 7명 정도이다. 6개월이 경과하면 15명, 1년 후에는 23명이며, 이후부터는 33명 31명 34명 등의 성장속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신문 6월15일자 2203호)
그러나 과연 ‘일반적 개척’이란 표현의 그 당면 환경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제가 보기에는 일단 ‘도심 개척’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같은 산골목회의 현장들을 살펴보면 6개월에 성도 수 15명은커녕, 6년 세월은 물론, 16년이 지나도 10명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양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형편없이 못하기 때문일까요? 저의 강원도 산골 목회의 경우는 (개척은 아니지만-) 첫 부임 시 성도 수가 7~8명에서 지금의 60여명으로 늘어나는데 12년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해마다 고른 성장을 보인 것이 아니라 첫 10년을 지내는 동안 늘 20명 안팎을 뛰어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교회의 성장은 어떤 공식이나 통계의 수치에 의한 도식이나 또는 산술적 보편 개념으로는 이해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엇’의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면, 도심목회 역시 개척 10년이 되어도 몇 십 명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기한 당지(當紙)에서도 미자립 교회들의 수가 전체교회의 80%를 넘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개척교회, 대부분이 ‘미자립 교회’로 전락해 문을 닫는다”라는 신물 일면의 대문짝만한 큰 제목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자립(未自立)- 말 그대로 ‘스스로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를 말할 때에는 특히 ‘재정’의 미자립을 뜻합니다. 돈이 없기에 늘 궁(窮)하고 그래서 교회의 전-월세 등 살림살이를 걱정하여야 하고, 하는 수 없이 한 가정의 가장된 목사는 가정의 유지를 위하여 교회 밖으로 ‘먹고 살 일’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일들이 이미 보편화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 73.9%가 목사 외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기독교 연합신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3일자 제1244호) 한 마디로 ‘생활고’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생활고(生活苦)... 그래서 가족부양을 위해서 또 다른 일터와 일감을 찾아야 하는 주의 종... 참으로 씁쓸하고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작금의 시대에 교회들의 형편은, 누군가의 진단이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점점 더 어렵고 힘들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수많은 대소 교단 신학교에서 매년 수 천 명의 ‘목회자’들이 새로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니- 이 ‘목사님’들은 모두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지경에서 ‘갈 곳 없는 길거리 목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강단’을 찾지 못한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을 거듭하며 목사도 일반인도 아닌 ‘어정쩡한 이’들이 되어 가뜩이나 마뜩찮은 눈길로 교회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렵게 개척을 하여 작고 초라하나마 ‘강단’을 가진 ‘개척교회 목회자들’ 역시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성도’ 아닌 ‘사람’ 모으기에 급급하여 ‘금반지’가 전도자의 상품(賞品)으로 등장한지는 벌써 오래 전이며 각종 이름 앞에 ‘왕’자를 붙여 호칭하여 주는 것으로 ‘명예의 관’을 씌워 줍니다. 하늘 아닌 땅에서 상급 받고 또 영광을 누리게 하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생겨나는 문제가 바로 ‘목회의 질적 추락’입니다. 즉, 저질(低質)목회이며 저질 목사의 필연적 출연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저질교회’를 생성합니다.
조급한 마음이 되어 교회와 목회는 ‘경건의 모양만을-’ 혹은 아예 그것마저도 팽개쳐버리고 노골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발 벗고 나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그럴 듯하게 포장 된 ‘사람의 말’들만이 난무하며 돈에 휘둘림을 당하는 교회로 전락하기에 사탄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처음의 믿음과 각오와 포부와 의지는 간 곳이 없어지고 결국 ‘하나님을 제쳐두고 재물을 좇아가며 섬기는-’ 비극의 목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과연 이 시대의 목사 된 이들 앞에 참으로 답답함으로 탄식케 하는 암울한 날들이 현재의 장면들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찌하여야 하는 것인지? 강원도 산골짜기 작은 교회의 목사는 이렇게 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양산되어지는 목사들을 어디에 세우실 것인가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들의 ‘개척’이 북쪽으로 물 밀 듯 올라가게 하여 주소서. 지금은 얼어붙은 동토의 땅 평양이 다시 한 번 ‘동양의 예루살렘’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까지 숱한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대륙을 향하여 숨을 고르는 교회와 주의 종들이 넘쳐나게 하소서.”
옥석은 어려움 속에서 가려집니다. 진주는 시궁창에서 더욱 빛나며, 소나무는 엄동설한(嚴冬雪寒) 속에서 그 푸르름이 더욱 주목을 받습니다. 다시 한 번 이빨을 사려 무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 믿음을 지키고 기도하는 나의 깍짓손이 으스러지도록 힘을 줍시다. 끝까지 정직한 것으로- 끝까지 절망하지 않는 것으로- 끝까지 성내지 아니하며 관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끝까지 돈의 미혹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를 ‘성도 됨’지키는 ‘참 성도’들이 됩시다. 아- 지금 흐르고 있는 모든 고단함과 괴로움의 눈물들을 훔쳐 냅시다. 나를 기뻐하시며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코앞에 와 있습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4-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