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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냄비
IP : 121.158.6.90  글쓴이 : 김홍우   조회 : 4243   작성일 : 14-06-08 04:41:15 |

반반(半半)냄비

 

드디어-!! 반반(半半)냄비가 등장을 하였습니다. 한 동안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과 짬뽕을 반반씩 담아주는, 이른바 ‘짬짜면’이 유행을 하였는데- 오늘 인터넷에 올라있는 광고를 보니 냄비 속 중간에 가로막을 만들어 세워 놓는 것으로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서 두 가지 요리를 한 냄비로 동시에 할 수 있는 신상품을 소개하고 있군요.

 

그러면 같은 한 냄비에서 동시에 김치찌개와 계란찜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불의 온도가 같고 조리의 시간이 비슷한 것끼리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아무튼 기발한 발상이며 새로운 풍속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내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나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한테는 좋겠네요.”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반반(半半)’ 즉 두 개의 절반이 모여서 하나 속에 있는 모양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은 반반으로 나누어진 것들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절반은 남자이고 또 절반은 여자인 것이 그렇고 낮 시간과 밤 시간이 절반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좀 더 비약을 하자면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그렇군요.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좋은 일 나쁜 일, 현명한 사람 무지한 사람... 그리고 국토마저 반반(半半)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나라이기에 전쟁과 평화도 거기에 해당 되는 것 같은데 저는 또한 목사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을 세상의 반반으로 떠올리게 되는군요.

 

저는 물리학에 대하여서는 완전 문외한이지만, 듣는 바로는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이러한 현상과 맥락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곧 세상은 서로 ‘상대적’ 반반(半半)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것들의 조화 여부에 따라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생성과 소멸을 만들어 내면서 사람들의 삶의 모양을 주관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연구도 보고도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나의 행복’을 완성시키는 ‘나의 반쪽’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배필로 주신 것을 모본으로 남녀 둘이 한 몸이 되어 부부로 살게 되는 것이 최초의 ‘반쪽들의 만남’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도 그렇듯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지만 허구한 날을 ‘웬수’로 사는 사람들도 있고 또 지금을 살아가는 30대의 부부 이혼율이 거의 4할 대에 육박하고 있고 또 50대 이상 부부들의 이른 바 ‘황혼 이혼’도 급증하고 있다는 관계기관의 보고이고 보면 ‘완성된 짝’으로 끝까지 살아가기도 매우 힘든 현실이 된 것 같고 그리고 완성된 모습이 아닌 곳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찾아 누리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우리는 “하나 되자.” “하나로 뭉쳐야 산다.” “한마음을 이루자.” 하는 등등의 구호와 캠페인을 많이 보았고 만났고 그래서 익숙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모양들을 볼 때 과연 사람들의 ‘진정한 하나 됨’이 가능한 것인지를 그 근본부터 찾아보고 또 돌아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모양으로 ‘국회’의 의원들을 들 수 있겠지만, 그렇듯 하나 되지 못하고 날마다 삿대질과 고함소리가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그런대로-’ 나라살림은 매년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하나 됨’ 보다도 겉으로는 ‘하나 됨’을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자기 살림’을 꾸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 됨’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한 가지에만 골몰하십니까? “한 가지만 해라.” “한 우물을 파라.”는 말들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지만, 사람들이 각각 당면하는 사정과 형편 속에서 그때그때의 급급한 모양을 ‘느긋하게-’ 덜어 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깊은 한숨을 쉬게 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조리기구 ‘반반냄비’는 그래서 지금까지 이 사회가 주창하고 교육하여 온 것과는 길도 정서도 달리합니다. 다시 한 번 더 도마에 올려 탕을 치는 모양으로 말하자면- 마치 국회라는 한 냄비 속에서 여야가 나누어져서 함께 ‘끓고-’있는 것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국회와 반반냄비의 속내를 살펴보면, 국회는 서로 고함과 삿대질로 엉키어 끓으면서라도 함께 가지만, 반반냄비는 한 냄비 속에 있기는 하지만 끝까지 ‘따로 가는-’모양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를 향하여서 튼실하게 막아놓은 가로막 때문에 마치 대구의 ‘따로국밥’처럼 모든 조리가 끝날 때까지 따로따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반냄비 광고를 쳐다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드디어 사람들의 두 가지를 동시에 채우려는 욕구가 ‘하나의 주창’이 주는 압박으로 억눌려 있던 새 세대 국민정서의 새로운 공식화로 그 발걸음을 내어 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 우스꽝스러운 비약을 하여 봅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와 또는 무엇인가와 가로막을 벽으로 세우고 따로따로 서있지는 않습니까? 두 가지를 동시에 하겠다는- 또는 갖겠다는 욕구와 욕망에서 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한 뚜껑’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냅다 더 큰 걸음으로 비약을 하여 보면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냄비 속에, 또 ‘우주’라는 냄비 속에서 각각의 모양을 고집으로 주창하고 있는 ‘끓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제 저렇듯 등장한 반반냄비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그 편리성을 인정 받는 다면, 곧이어 거기에 맞춘 새롭고 기발한 ‘반반요리’가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곁에 서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반쪽’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비록 아무리 애써도 절대융합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냄비 속 세상에서 ‘나의 필요’와 ‘나의 맛’을 유지하고 찾아내는 것으로 우리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행복함에 한 걸음 더 다가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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