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담요와 카펫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온담요’ 혹은 ‘난방덮개’라고도 하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가장 쉽게 많이 부르는 이름은 ‘거지담요’입니다.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난방이나 보온의 용도로 쓰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 어떤 이는 ‘못 쓰는 옷가지들을 풀거나 잘게 오린 것을 기계로 눌러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길이 폭 2m 길이 15m로 둘둘 말아서 철물점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볼품도 없을뿐더러 이것저것 각양의 천조각들과 실밥들이 마구 뒤섞인 모습이라 ‘거지담요’라는 이름을 얻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마당 성전 출입구 쪽에도 그것을 두 장 사다가 깔았습니다. 눈이 녹아 얼음이 된 것이 반질반질하여서 나이 드신 분들이 넘어지실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아내와 함께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그 한쪽이 크게 찢어져서 말려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즉, 집사님들이 장비로 눈을 치우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 모양을 발견하고는 “아이구, 우리 카펫이 왜 이 모양이 됐냐!?” 하면서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제가 안 해도 좋을 소리를 했습니다. “카펫은 무슨... 거지담요 가지구...” 쯧-쯧-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가 됩니다.
저는 그것을 한낱 미끄럼 방지용 ‘거지담요’로만 취급했지만, 아내는 그것의 위상을 ‘카페트’로 격상시켜 준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교회 마당에서 예배당 출입구까지 깔려져서 예배하러 오는 성도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걸어 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카펫이라... 혹시 아내는 무슨 영화 관련 행사 때에 스타배우들이 밟고 들어가는 ‘레드카펫’을 생각한 것일까요?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물론, 그 위를 걷는 이의 품위를 더하여 주고 마음도 가다듬게 하여줄 것이니 말입니다.
비록 허술하고 값싸게 만들어진 ‘거지담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유익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어 집니다. 우선 보온과 난방 쪽으로 관련하여서 사용 되어질 때 추위와 동파사고를 막아주며, 이렇듯 미끄러운 빙판길 위에 깔려지는 것으로 혹시 있을 어르신들의 낙상사고를 미리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것도 마침 교회 마당에서 예배당 입구 쪽으로 깔려 있는 모양을 보니 과연 ‘카펫’를 깔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 그 역할에 대한 칭찬으로 마땅한 것 같습니다. 허허
요즈음은 지물포 같은 곳에 가보면 크고 작은 카펫을 가득히 쌓아놓고 팔고 있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만 하여도 카펫은 ‘부의 상징’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쩌다가 가끔씩 커다란 양옥집에 살고 있는 내 친구 아무개 집에 가보면 아름다운 문양의 커다란 카펫이 거실 한 가운데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고 그 주위를 푹신한 소파들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아, 이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러움이 가득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라서 일까요? 지금은 추운 겨울 마당에 카펫처럼 펼쳐져 있는 거지담요를 보면서 “정말 거지들은 저것을 깔고 덮고 추운 겨울을 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금은 ‘거지’라는 이름들은 모두 없어졌지만 이러한 강추위를 못 견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돌아보면, 크게 여유가 없기는 해도 아직까지는 사는 처지에 내몰리어 길바닥에서 자 본 일이 없기는 하지만, 어쩐지 이 추운 겨울- 살을 에는 혹한 속에서 정말 저 거지담요마저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듭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도로 위나 골목길 동사(凍死)사고도 많았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저런 이유로 길바닥으로 내몰림을 당하여 지금 같은 눈밭 길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는 이들이 TV에 비추어질 때마다 이렇듯 따듯한 방에 앉아있는 목사로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곱씹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사회에서 ‘거지담요’와 같은 대수롭잖은 대우와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어쩌면 그 존재의 목적이 세상의 ‘따듯함’을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따듯한 사회 살만한 사회는 서로 돕고 베푸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어렵고 가난한 이들의 모습은 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지금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서 더욱 깨닫고 감사하며 또 그러기에 더더욱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돌이켜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안배하심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러한 이들은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가게 하여주는 고마운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마치 ‘거지담요’가 빙판길에 ‘카펫’처럼 깔려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심령이 세상의 강팍하고 완악한 풍조 속에서 실족하여 미끄러지고 다치고 망가지는 일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일찌감치 거지담요를 카펫으로 격상시켜준 제 아내는 이미 그러한 모든 것을 두루 깨닫고 베풂과 나눔의 복된 삶의 원리를 익히고 섭렵한 ‘위대한 사모’일까요? 허허 그리고 하나님은 저 또한 그렇게 깨닫고 대오각성 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셔서 그러한 여인을 내 곁에 세워 주신 것일까요? 허허 참.)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가는 바람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데- 그래서 얼어붙고 눈 덮인 마당에서, 그나마 한 쪽이 크게 찢어진 채로 여전히 누워있는 ‘거지담요’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 누구냐... 넌...?”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