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거지 기도
60년대에만 하여도 거리에 거지들이 있었습니다. 손에 미군용 반합이나 깡통을 들고 다니면서 돈도 아닌 ‘밥’을 구걸하였습니다. 당시는 너도 나도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사람들은 “밥 좀 줘-”하면서 문간에서 구걸하는 거지의 깡통에 식은 밥과 남은 반찬 등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밥을 골목 어귀 등에서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꾸역꾸역 퍼먹곤 하던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희한 한 것은 그렇게 먹는 모습이 얼마나 맛있어 보였는지요. 옆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던 기억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 중에는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들이 있었습니다. 이름 하여 ‘거지 떼’입니다. 주로 마을 잔칫집 같은 곳에 우르르 몰려와서 깡통을 두드리면서 소란을 피우면 잔칫집에서 사람이 나와 얼마의 지전을 쥐어주면서 달래 보내곤 하였지요. 떼로 몰려온 거지들의 소란은 말릴 수가 없었고- 또 좋은 날에 소동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하였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떼로 몰려온 거지들의 요구는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다는 데서 ‘떼거지’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소란을 피우며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떼거지 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떼 쓴다’는 말이 되었고 “떼 쓰지 마라!!”는 핀잔을 부르게 되었지요.
억지와 고집을 부리면서 천박하고 파렴치한 모습으로 소란을 피우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이 ‘떼거지’라면, 그 반대의 모습은 ‘신사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르고 정직하며 이성으로 사리를 분별하고 상황을 파악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합리적인 모습입니다. 성경 고린도 후서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사라는 말은 바르고 정직하며 변함이 없는 모양을 말합니다. 마땅히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이와 같아야 할 것이지만...
최근에 어떤 일을 계기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신사적이어야 하고 하나님께는 떼를 쓰는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은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떼를 쓴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 그리고 부당함을 잘 알고 있는 모습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하고 자격이 있다면 떼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떼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 올려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떼를 쓰는 아이들이 일면 영리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떼거지’가 통하지 않을 만한 사람에게는 결코 떼를 쓰지 않기 때문이지요. 떼를 쓰는 대상은 거의가 엄마이고 다음이 아빠인 경우이지 큰 아빠나 큰 엄마 또는 학교 선생님이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들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떼를 쓰는 대상으로는 자기를 가장 사랑해 주고 품어주고 먹여주고 살펴 주는 사람을 택하는 것인데 즉, 떼가 통할만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엄마 아빠이지요.
원하는 것을 이루고는 싶지만, 합당치 않고 자격이 모자라고 형편이 되지 않을 경우 떼거지를 쓰게 되는데 당연히 그래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그 요구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정확히 분별하여 대상으로 정한 후에 - 아무데나 주저앉아서 팔 다리를 휘젓고 눈물 콧물을 쏟아가면서 떼거지를 쓰는 것인데 - 그 이루어질 가능성을 진작부터 계산을 해보고 대상을 선택한 것이므로 한 편 영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엄마 아빠는 “그래, 그래- 알았다.” 하면서 들어 주지요. 그러나 또한 무조건 적으로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아이에게 해가 되고 독이 되는 것이라면 허락은 커녕 매를 들고 다스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들어 줄만한 적당한 것을 지혜롭게 고르지 못하면 오히려 ‘매를 버는-’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엄마 아빠의 지극한 사랑이 있습니다. 들어주는 것도, 매를 드는 것도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자녀 된 성도들의 간청 기도에 대하여서 이와 같지 않으실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밤낮 부르짖는-’이들의 끈질긴 간구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떼쓰는 기도’라고 하여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심으로는 “이것은 참 부끄러운 간구 기도야 내가 저지른 일이고 나의 잘못 인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들어 달라고 기도하겠어...”라는 염치없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 질끈 감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 떼쓰며 기도하는 것 밖에는 남은 것이 없잖아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엊그제 병세가 갑자기 악화 되어 급히 병원에 입원한 우리 성도를 심방하여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병원 측으로부터 “이제는 힘들다.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오열하는 부인 집사님과 아직은 홍안의 청소년들인 자녀들의 손을 붙잡으면서 저희 집사람이 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원 복도 한 편에 마련된 휴게실에 나와서 둥그렇게 손을 잡고 둘러서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알려서 새벽마다 시간마다 그 이름을 부르며 합심 간구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달린 것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사로운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생명에 관한 것이니 그저 긍휼을 베풀어 주심을 바라며 떼거지를 쓸 뿐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떼거지 기도가 되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는 저 아이들을 보아서라도 꼭 들어 주세요. 꼭 들어 주세요.”
이 기도에 동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