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눈물
동서를 막론하고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반겨하는 풍토는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울 일이 많이 있지만 눈물은 세 번만 보이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결국은 꾹꾹 눌러서 참으라는 말인데 왜 참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해석이 제각각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남자는 약해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또 약해보여서 안 되는 이유는 바로 남자, 곧 ‘사나이’이기 때문이라는 논리인데 그 속에는 ‘가족과 무리와 국가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정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의 세계에서 눈물은 나약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자이기 때문에 울고 싶은 것도 꾹꾹 참았던 기억들을 모든 남자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옆에서는 할머니나 엄마들이 “어이구 장하다 역시 남자라서 울지를 않네.”하면서 ‘사나이’를 부추겼기 때문에 사내아이들은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그래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되어도 그것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애쓰는 훈련 아닌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남자가 돼가지고 그만한 일에 우냐?” 그래서 핀잔과 책망이 곁들어진 이 말이 원망스러울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어떤 일에도 울지 않는 씩씩한 남자들’이 되었지만 사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남자들의 눈물은 언제나 마음속에 질척합니다. ‘흐르는 눈물’이 여자들의 전유물이라면 ‘삭이는 눈물’은 그래서 남자들의 전유물입니다.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엉엉 소리치며 펑펑 울고 싶은 때가 남자들도 종종 있다라고 말한다면 남자들만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이렇듯 꾹꾹 눌러 참는 것으로 ‘씩씩한 남자’의 모습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어제 잠시 TV를 보면서 눈물이 뚝 떨어지는 것에 스스로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는 것에 안도를 하였으니- 정말 남자는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씁쓸하기도 하고 허허롭기도 하고 일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중간 즈음부터 보게 된 그 방송은 ‘세상에 이런 일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식도’가 없었던 방장 24살의 아가씨의 사연입니다. 얼굴도 예쁘고 체구도 아담한 이 처녀는 평생에 단 한 번도 음식을 삼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얗고 예쁜 아가씨의 배 한 쪽에 흉측한 구멍을 뚫어 호수를 연결해 놓고 끼니때마다 묽은 음식물을 주사로 넣으며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날마다 간절함과 안타까움의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아빠 엄마와 식사를 할 때마다 밥상에 같이 앉아서 이것저것 음식을 입에 넣고 씹기는 하지만 절대로 삼킬 수는 없고 옆에 마련된 통에 모두 뱉어내야 합니다. 그저 식구들과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과 음식의 맛이나마 본다는 것인데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조차도 감히 나올 수 없는 처절함입니다.
다행히 직장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직장동료들이 모두 점심식사를 하러 나갈 때면 혼자 남은 이 아가씨는 주사기와 두유를 들고 화장실로 갑니다.... (정말 너무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요.)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으니 더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정말 ‘세상에 이럴 수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원망이 가슴 가득 터져 올라옵니다. 주사기로 연명해 온 24년, 그러한 딸을 바라보는 아빠 엄마의 이미 다 찢어져 버린 가슴앓이의 24년....
방송사의 지원일까요 독지가의 도움일까요?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모습이 나옵니다. 상태가 너무 안 좋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 라는 진단 결과에 저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아빠는 병원 복도에서 굶고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이 너무 죄스러워서... 아이가 저러고 있는데...”
가족들과 함께 TV를 보면서 안타까운 사연과 모양들을 많이 보고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려고 엄한 짓도 많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흘러내리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내버려 둔 이유가 바로 저 혼자 TV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가족들과 함께 보고 있었다면 저는 또 무슨 뜬금없는 모양새로 눈물을 애써 삼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해집니다. 남자의 눈물, 그래서 이 기회에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왜 남자는 눈물도 마음대로 흘릴 수 없는가!? 남자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아는가!? 그대로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은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저도 이젠 ‘아가씨가 된’ 아이와 또 잠시 후에 ‘아가씨가 될’ 두 딸아이와 함께 살고 있어서 일까요? 이러한 삶의 시달림의 모습에 왠지 모를 분한 눈물이 또 나오려 합니다. 한 편으로는 어제도 오늘도 꾸역꾸역 잘 먹고 있는 두 딸아이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오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구조적으로도 ‘나만의 행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우리 앞에 등장하고 보여 지는 안타까운 모양들에 대하여서 ‘일면식도 없는 어느 누군가’의 일로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또 그러한 안타까운 일들은 언제나 차고 넘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역시 수많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면식도 없는 어느 누군가’라는 존재인 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우한 이들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방송 중에 언뜻 들으니 그 아가씨의 이름이 제 아내의 이름과 같네요. 그 이름을 놓고 기도합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