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한국 기독교사의 회고와 전망
가. 한국 기독교사상사의 전개 ( 김용복 )나. 민족교회로서의 한국교회 정체성 이해다. 삼일운동과 기독교
가. 한국 기독교 사상사
1. 서론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민중의 역사적 대응의 이야기 즉 사람의 역사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기독교 사상사도 결국은 인간의 경험이나 사상이 복음적 내용으로 소화되어 개개인의 민중 혹은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민중의 신앙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므로 민중의 역사적 경험과 상황들의 표현인 민중의 사회전기로서 읽을 수 있겠다.
2. 카톨릭의 수용과 한국민중사신라의 미륵불교, 아미타불교가 당나라를 통한 네스토리안 기독교와 상호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유토피아, 이상국 지향의 메시아 대망적 민중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이조말기에 전래된 카톨릭은 통치계급에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외된 지식인 공동체인 남인 유학자, 실학파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홍길동전의 허균, 지봉유설의 이수광, 어유야담의 유인몽, 천학초함의 정두원 등이며 마테오릿치의 천주실의 등 카톨릭 교리나 서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그들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체제에 적대적이었던 중인계급과 가까이 교류했고 소외지식인의 전형적인 인물인 허균은 그의 대표작인 소설 홍길동전이 바로 그의 사회전기적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온 후 본격적 신앙 공동체로 출발한 초기 카톨릭은 제사문제, 조상 위폐문제 등의 의례문제에서 당시의 사회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충돌하게 되고 정치적인 이해관계로도 작용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와 탄압은 남인 학자 집단으로 출발한 한국 카톨릭 공동체에 십자가의 의미를 부여하고 고난받는 민중들 즉 상놈들과 더 친숙하고 가까워져 카톨릭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더 촉진하게 되었다.그러한 확산에 기여한 요소로는 당시 고통에 찌든 민중들에게 불교의 정토극락이나 도교의 선계, 홍길동전이나 정감록에 나타난 것과 유사한 메시아 대망적, 종말론적, 유토피아 지향적인 복음의 내용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고 민중언어인 한글로 번역된 카톨릭 서적의 보급도 일조를 했을 것이며 종래의 유교적 허례허식, 허위의식에 저항하는 생활 윤리적 요소도 중요한 요소로서 유교와 역사적인 대립관계를 형성하며 점차 더 힘을 얻어가게 되었다.
3. 억압받는 민중들 사이에 자리잡은 개신교 역사는 우연이 아닌 필연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거룩한 예정은 가장 효과적인 하나님의 시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역사하게 됨을 한국 기독교 사상사를 통하여서도 관찰해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한국에서 개신교는 민중의 종교로서 시작하고 다시 민족의 종교로서 자리를 차지하여 가고 있는데에는 가난한 자를 들어 부요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약한 풀잎과도 같은 민중의 힘으로 권세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많은 순교의 피를 흘린 카톨릭의 희생에 힘입어 그들보다는 좀 더 쉽게 이 땅에 정착할 수 있었던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민중이 사회개혁을 열망하고 있으며 하층민들이 진보적 변화를 원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당시 부패한 사회체제는 억압받는 조선 민중에게 정치 사회적 개혁운동에 쉽게 이끌릴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였고 또한 민중언어인 조선어로 된 기독교 문학의 발전은 일반 민중들에게 쉽게 전파 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그리고 초기 한국 개신교회는 오늘날의 개교회 중심주의의 근원이 된 네비우스의 자치, 자립, 자전의 3자선교정책을 따랐고 선교지 분할 협정을 통하여 효과적 전도활동을 수행하면서 개신교내의 소모적 분열 상황을 피할수 있었고 오히려 우호적인 협력과 상호존중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결정한 민중선교노선은 그 당시의 1893.1 제 1차 선교대회에서 근로계급, 부녀자, 여성교육, 기독교 청소년 교육, 순한국말의 성서와 종교서적, 의료와 교육의 이용등을 통해 민중들에 기여하였고 그들을 변화 시켰고 민중들의 사회적 열망에도 부응했으며 그들 마음속에 원하던 바를 밝혀 주었으므로 소리없는 사회변혁의 혁명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생명력 있는 종교로서 역사하는 힘이 되었다.구약시대 애굽인에게 압제 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통하여 불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당시 갈 바를 모르고 어둠과 질고 속에 놓인 우리민족을 구원하시리라는 소망을 주었을 것이며 신약시대 로마의 정복하에 고난 받는 이스라엘 땅에 비천한 민중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조말기의 타락한 관료집단이나 일제치하에서 고통받던 한 민족에게 복음의 형태로 다시 찾아 오셨고 그들의 상처와 눈물, 한과 고통을 공감하여 위로하여 주러 오셨다.이처럼 민중을 중심한 기독교 공동체 였기에 조선 기독교는 민중들이 있는 곳이면 도시와 지방 그 어느 곳에서나 동학의 포와 비슷한 자립적 세포조직을 형성할 수 있었다.물론 그들이 처음엔 빵이 필요해서 오기도 했을 것이고 의료가 필요해서 오기도 했을 것이며 민족의 독립이나 애국애족의 마음이 순수한 신앙보다 더 우선 순위에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아오기까지 그들에겐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독교 메시지에 응답하였고 그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속에 각 개인의 인격이 변화되는 온전한 신앙으로 승화 되어 갔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민중 계몽 교육사업과 더불어 종래의 유교적 공동체를 뒤흔든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변화 시켰고 남녀 평등 사상을 고취 시켰고 독립운동의 지도 정신으로 자리 잡았고 정치개혁과 사회발전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려는 민족운동에 참여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참여 정신은 정부의 우려를 촉발 시켰고 조선인은 단 한명도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선교사들에 의해 정교분리 독트린이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국민들은 진보운동의 지도자인 서재필, 윤치호 등 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을 존경하였고 그들의 정치사상을 받아들임과 함께 종교도 받아 들이게 되었다.그들은 조상 때부터 내려온 유교문명이 잘못된 것이며 낡은 것으로 생각했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가장 고도의 문명과 문화는 기독교이며 기독교는 자유와 해방의 복음으로 여겼다.그러나 유교적, 주자학적 영향에서 비롯된 교조적인 요소는 정교분리원칙이후 선교사들의 교조적 규범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계 내에 하나의 병으로서 공존하고 있다.
나. 민족교회로서의 한국교회 정체성 이해
1. 신앙수용의 동기에 나타난 민족교회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래1592 -1598 임진왜란때에 군목이 천주교를 전파했다 하나 큰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병자호란때 소현세자의 사건1637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굴복하고 그 결과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아담 샬을 만남으로서 1644년 천주교 수용.소현세자는 지배층이지만 약소민족의 고난과 서러움을 겪은 상징적 인물로서 힘의 종교로서 천주교를 받아 들였다.
2) 개신교의 출발1876년 백홍준, 이응찬 등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우리나라가 개항을 했다.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는데 그 사이 20년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동학사건, 청일전쟁, 민비시해, 아관파천, 독립협회 결성등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했다. - 한국인은 청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강한나라 라고 생각 했으나 섬나라 일본에게 패했다.개인적 차원에서는 관리들의 탐학, 착취를 피하기 위해 또 가난을 이기기 위해 신앙을 수용 했으므로 선교사 보고문에 라이스 크리스챤 이라고 기록.사회적 차원에서 반봉건 개화사상, 반일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기독교 입문동기가 기독교 국이 대개 다 강대국인 것을 보고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보호 등을 목적으로 입교 하였다.월남 이상재 선생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라의 비운이 참상의 변까지 몰아오는 것을 겪으면서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나라구원의 길을 찾아 보려는 일념으로 기독교의 믿음을 찾게 됐다.이러한 동기들을 선교사들은 우려한 경우도 있으나 신앙이 역사와의 함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동기로 신앙을 수용하는 것을 비신앙적 이라고 할 수 없고 복음적 동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예를 들어 눈먼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나 그가 내 두눈을 뜨게 해준 사실을 알고 있다. 이념적, 사변적, 추상적이 아닌 민족역사와 함께 부대끼며 형성된 교회이며 한국역사의 격변기에 한국교회가 급성장하게 된 것은 (1895-1905, 1910 년) 이런 사상과 관계가 있다.
2. 민족교회 형성 모델
선교는 그때 거기서가 아니고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발견케 하는 것이다.선교의 항목은 그가 처해있는 사회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는가에 맞추어서 결정 되어야 한다. 1876 -1919년 사이 한국교회의 최대 관심 사항은 개화와 독립운동 이었고 민족사의 과제가 곧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되었다.1907년 성령운동은 길선주목사가 타계적 성격의 전도에 힘쓴 결과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한국 교회가 그 당시의 의식구조와 생활의식을 개혁하고 사회신분제도와 남녀 성차별, 정치개혁, 항일독립운동등을 주도 하였다.대성학교는 민주주의를 고취하고 항일투사를 양성하였으며 상동교회 지하실은 독립투사의 모의 장소로 사용된 것처럼 한국교회는 다양성을 가지고 발전 해 왔다. 그러나 민족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모델은 3.1 운동인데 이것은 에큐메니칼 정신의 교회요. 사회정치적인 민족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3. 민족교회 정체성 상실
1920년대에 들어 총독부의 문화정책으로 인해 한국교회 지도자의 지하와 해외망명으로 지도자가 결핍되게 되고 한국교회의 관심 연령이 청년에서 유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는 유년주일학교가 가장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시기였고 민족교회로서의 사회성 상실의 양상이 나타났다. 교회의 관심은 오늘의 사회현실에서 미래사회로 바뀌었고 사회정치투쟁은 계몽운동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계몽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1930년대에 친일파로 변절 되었다. 이러한 20년대의 상황하에서 일본은 1930년대에 만주사면을 일으키고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강요가 가능했을 것이다. 1920년 초부터는 조합교회를 한국에 침투시키고 계몽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접근시키므로서 해방이후 교권투쟁과 정권밀착, 지역, 인맥등에 얽혀 기독교 정체성을 상실해 가게되었다.
4. 민족교회의 정체성 재창출
1960년 4. 19 이후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등이 교회의 문제로 대두되었고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선언등으로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재창출하게 되었다.교회는 역사속에 있고 역사는 민족의 얼과 함께 살아 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복음은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전파되는 것이지 보편적인 상황에서 전파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일반화 하면 복음은 죽는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나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민족신학은 민족교회를 민족교회답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우리 민족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민족의 현실 그 자리에서 존재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교회가 민족 교회이다.\"한 세대가 지난 세대의 성과를 감싸며 뛰어 넘어야 한다는 명제는 어느 시대나 요청되는 바이지만 이 시점의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위로 보입니다. 한민족 공동체의 삶에 이바지할 진정한 민족신학의 길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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