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하겠으나 지상의 가시적 교회는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와 한국교회의 위기를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역사 속의 여러 교회의 흥망성쇠를 떠올리며 십자가 앞에서 우리자신을 겸손히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감격 속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다시 그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사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여야 한다”고 신약성경 벧전 2:9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세상과는 분리된 채 계급적이고 권위적인 흑백논리로 여러 가지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들을 물려주려 하고 있고 그러한 측면이 결국 교회의 위기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부름 받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고 그러한 삶은 소수 엘리트들의 특권이 아니라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중세 성직자들이 사제직 만을 유일한 소명으로 간주했듯이 한국에서도 목사와 장로직을 계급적, 계층적으로 운용하며 그러한 제도 속에 신도들을 적응시키고 평신도운동을 장려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교회 내적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느라 별 차이도 없는 교리와
교의 논쟁에 얽매여 세상에 대한 복음의 생명력을 잃고있다.
교회는 사회와 역사성의 문제를 함께 고뇌해야만 전통성과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겠으나 그동안 교단, 교파의 분파적 경쟁에 힘쓰느라 타종교보다 사회를 위해서나 인간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행동을 보이지 못한 채 일회적 처방으로 그때 그때 적당히 처방해 왔다.
물론 일제치하의 정교 분리 정책이나 분단이후의 독재정치에 의한 많은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을 것이나 결국 그러한 양상이 축적되도록 두고 본 많은 원로 성직자들이나 교계 선배 리더들의 신앙적 안목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예를 들어보면 의사인 평신도가 있을 때 목회자는 그를 사회에서 그가 속한 의료적 전문 분야의 정책적 사안이나 사회적 사안에 대해 남보다 앞서서 바르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평신도의 에너지를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계도하고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지 교회에서 십일조, 감사헌금 등을 많이 하고 중직자로서 예배와 교회내의 대소사를 열심히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때까지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그 평신도를 사회를 섬기는 존재로 키우거나 장려하는 것이 오히려 목회자분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YMCA의 간사들이 Y의 운동을 위해 필요한 일꾼들을 찾거나 리더로 역할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과 같이 각 지교회에서 평신도 리더들을 참여적 평신도 운동의 장으로 파송하는 자세로 그들에게 맞는 청소년, 여권신장, 환경, 교통, 복지, 제도개혁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도록 일깨우고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적 삶을 구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그 목회적 본영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교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교회의 활기가 줄어드는 것을 교회내에서 전도훈련, 기도, 영성훈련 등으로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볼 수 있는데 이것만이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2%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비슷한 내용으로 다시 예배보고 기도하고 모이고 하는 일에 신도들을 계속적으로 동원시키는 것은 메시지로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지루함을 느끼게 하고 충실히 참석치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죄의식에 빠져 학사경고를 받는 학생과 같이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영성훈련, 교회에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모든 예배 참석 그리고 당번을 통한 봉사나 선교회의 참가등 제반훈련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등학교수학의 적분식으로 어디에로 수렴하는가 유추해 보면 목사님 수준의 교회봉사와 경건생활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목회자가 될 것을 한때 심각히 고민해 본적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직을 놓고 목사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불가능이나 노역에 가까운 외형적 신앙생활로 복음이 그 생명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많은 평신도들이 진지한 의문을 표하는 것을 보았다.
현재 미국에서 오순절주의 교회가 많은 각광을 받고 있고 한국에서도 개교회로서 그 양적 최대치를 달성하는 곳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인데 그것을 이 시대의 해답이라고 생각하고 그 예배형태를 모방하여 교인수의 양적 증가를 도모해 보려는 다양한 시도를 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위기상황과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성경과 복음의 빛에 비추어 내린 최선의 해법은 아니며 달콤하고 일시적인 감성적 처방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화 사회에서 소외된 개개인의 고독함을 달래주기에는 영적 열광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스트레스 해소적 기능의 영적 카타르시스일 따름이지 성도의 삶에 대한 지속적 의지를 부여하는 진정한 해답은 아닐 것이다.
교회가 경영이 어렵다고 해서 또는 자신의 권위 아래에 두기 위해 교인들에게 죄의식을 강화하거나 감정적 들뜨기를 시도하여 일시적 양적 팽창을 도모하거나 그 숫자적 권위로 살아 남으려고 하는 것은 성숙되지 못한 발상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영성은 이성과 감성이 삼각형으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냉철하고도 뜨거운 믿음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는 영적인 힘이다.
평신도가 가진 힘을 교회 내에서 몽땅 소진시키기보다 그의 참된 가치를 온전히 개발하게 하여 그가 속한 사회적 섬김속에서 자신의 달란트를 보람있게 잘 사용하여 다시 두달란트, 다섯달란트를 남기는 예화적 인물이 되게 평신도를 지원하고 그를 개발해주는 것이 바른 목회라고 생각한다.
감성이나 영성개발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교육과 사회적 참여와 다양한 교류이다. 오늘날 우리는 후기 산업사회를 거쳐 너무도 복잡다기한 정보화의 세계속에 살고 있다.
성직자와 교회의 리더들은 복음의 진실과 예수를 처음 만난 사랑을 잊지말고 넓은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성도들을 지교회내에 제한시켜 자기교회에 맞게 키우고 길들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안목을 넓혀야 하며 남을 북돋우고 서로 도와서 이 땅에서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서로 잘 감당 할 수 있을지 온갖 분야로 열심히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고이지 말고 흘러가야 하며 모든 기득권을 분토와 배설물 같이 여기고 복음의 정신으로 세상을 보며 순례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취약한 삶을 살아가는 온갖 작은 이들의 인권과 자발적 참여적 평신도운동의 영역에 예수 믿는 신도들이 그 기본 역량이 되게 흩어 보내야 한다.
YMCA 운동과 같은 청소년 운동, 참여적 평신도운동을 교회 전반에서 선도해야 하고 통일운동, 공정한 분배정의, 나쁜 권력이나 정경유착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해야한다.
복음은 이 시대의 소금이요 누룩과 빛으로서 우리의 삶과 이 사회를 아울러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전통 속에 굳건히 서야하나 그 전통이 실체적 진실의 전통이냐 정치적 분파 작용 속에 피상적인 의전 형태로 남은 고착화, 화석화한 전통이냐에 대해 깊은 뉘우침과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며 기독교가 연합하는 일, 사회를 섬기는 일에 지교회의 성도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보내어 이 시대에 주어진 소임을 다하게 할 때에 그들은 다시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따라 백성들과 더불어 출애굽의 길을 떠나야 하며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고기 가마가 주는 노예적 풍요함에 머물거나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끝없이 자신의 부족함만을 아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 양의 피가 우리의 문설주에 묻어있고 세기말적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가 한국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중심을 이루며 지나가고 있다. 무교병을 먹고 순례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 이스라엘의 백성과도 같이 이제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고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의 삶을 들어 어둡고 깊은 홍해와도 같은 이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평신도운동으로 새로운 대로를 만들며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게 함께 믿음의 한 발자국을 내디뎌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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