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3:2)
휴-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면- 자연풍광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그들의 ‘말이 없음’입니다. 산과 들과 바다와 강 그리고 숲과 나무 꽃 들이 모두 ‘말(言)’이 없기에 그 아름다움이 퇴색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소리로의 표현’은 있을망정 구구절절 속 깊은 ‘언어의 이해’를 전제로 소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어진 목적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창조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말’ 곧 언어(言語)를 심도 있게 구사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참으로 큰 특징이며 장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이들에 의해서 자칫 그 특징과 장점을 완전히 무색하게 하는 가장 큰 결점이며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의 ‘말’ 곧 언어 능력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은혜의 기술이며 도구로 만들어지고 주어진 것이기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삶의 성공자이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말’은 그렇듯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속이고, 미혹하고, 왜곡하고, 저주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받아서 악하게 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새삼스럽지 아니한 것은 사람들은 온갖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때리고 죽이는 것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것들 역시 그렇듯 ‘좋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좋은 것’에 의해서- 또는 이용하여- 라는 것을 잠시만 턱을 괴고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기에 탄식과 더불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끝을 모르는 욕심으로 생성된 죄성을 물리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그 ‘악한 목적이 세상에 공표되면서-’ 등장한 발명품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카메라, 컴퓨터, 휴대폰, 녹음기, 망원경과 다이너마이트...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생활의 편리와 풍요를 더하기 위한 것으로 발명된 것들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들이 지금 각종 범죄의 이용도구들로서 널리 활용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총’만하여도 그것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 방어와 보호’를 위해서 이지만, 그러나 이제는 죄 없는 이들을 향한 ‘공격용, 살상용, 범죄용’으로 한없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손에 들려지는 도구들 보다 훨씬 앞서- 그리고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한 결과를 일으키면서도 거듭 범죄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일선에 ‘입’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말하는 입’보다는 ‘품는 마음’이 먼저이겠지만, 사람의 속마음은 드러나지도 않고 객관화 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범죄의 증거를 찾는다면 ‘입이 한 말’과 ‘손이 저지른 일’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드러난 ‘의도와 행위’를 증거로 사회적 징벌 공감대가 형성되고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의 입은 온갖 시비, 다툼, 싸움을 일으키는 일의 선봉장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일으키고 평생 원수가 되게 하는 일도 만들어 냅니다. “저 사람 하는 말이 괘씸해서-”라는 말은 많이 듣지만, 손이 괘씸해서, 발이 괘씸해서...라는 등의 말은 들어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입’을 통하여서 나오는 것이므로 ‘입조심’ 곧 ‘말조심’은 ‘불조심’보다도 더욱 큰 것으로 강조되어 종용과 권면 그리고 주의와 경고로도 교육되고 받기를 거듭합니다. 물론 손으로 쓰여 진 ‘글’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그것 역시 ‘그 사람의 말’이 ‘글’이라는 형태로 옮겨 표현되어진 것이기에 역시 ‘말’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위 말씀 중에 “말의 실수...” 에서 실수(失手)는 무엇입니까? 우선은 사전적 정의 대로 ‘부주의에서 나온 잘못’입니다. 곧 ‘고의(故意)’와는 구분되어 지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한 말이나 행위가 아니라 ‘자칫 주의하지 못한 상태 또는 상황에서-’ 되어 진 잘못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어도 고의(故意)냐 실수(失手)냐 하는 것의 판명에 따라서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고 과실치사(過失致死)로 단단히 혼이 나는 정도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게 됩니다.
따라서 ‘말의 실수’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주의하여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안 하겠다고 하여 쉽게 안 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칫 혹은 아차 하는 순간에 흔히 저지르는 일’이인 것은 여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시 어떠한 형태로이든지 어느 쪽에게도 덕과 유익이 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므로 누구나 특히 성도된 이들은 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서 말의 실수로 인하여서 곤혹을 자처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다행한 것은 여기에서 사람의 ‘말의 실수’ 라는 것에 대하여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으며 그러한 ‘부족한 모양’을 그대로 품으면서 다만 그러한 실수를 거듭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감사한 말씀이지요.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또다시 거듭 반복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며 첫 번 실수와는 달리 용서의 판정을 받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용서하여 보내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장 상황으로 보아 간음하여 잡혀온 여인이므로 ‘다시 또 간음하여 이 같은 일이 반복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광의로 볼 때에 사람을 위험과 곤경에 빠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죄악’에서 떠나고 그 근접을 막아내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여인이 ‘미혹을 이기지 못하고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로 인정을 해주셨거나 또는 그렇게 받아 주시고 관용을 베푸신 것이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신 것을 그 여인은 뼈에 새겨야 했고 후세에 이것을 전해 듣고 읽는 우리들 역시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전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그 실수가 언제나 ‘실수’로서 계속 용서되거나 묵인되어지는 것은 아니라 실수가 거듭되면 그것은 ‘고의’로 판정되어질 수밖에 없고 심중에 일어나는 ‘고의(故意)의 미혹(迷惑)’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실수에 대한 주의와 경고를 앞서 받고도 깨달아 알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으므로 거기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받아야 하고 또 마땅히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지 아니하는 삶’ 특히 ‘말에 실수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날마다 경주하여야 하는데 바로 악한 모양과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굴레’를 씌우고 그것으로 자신을 ‘어거(馭車)’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까요? 한 번 실수는 마음을 상하게는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두 번 같은 실수는 원수가 되게 하여 심각한 외면을 불러오고, 세 번째 거듭하는 실수는 전쟁을 일으키고 쌍방에 많은 피를 흘리게 합니다. ‘실수를 하는 것과 그 실수를 거듭하는 것-’ 이 불러일으키는 참혹함입니다. 실수 중에서도 가장 많이 하고 가장 앞서 있는 것이 바로 ‘말의 실수’입니다. 이를 줄이고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거운 입’이 해답입니다. 오늘도 ‘간질-간질-’ 내 목구멍까지 올라와서 혈기를 타고 확- 뿜어나가든지 아니면 비위를 맞추려는 처세로의 간사한 혀에 담겨져 이제나 저제나 입 밖으로 나갈 기회만을 엿보는 ‘부덕의 말’들을 꿀꺽 삼켜내고 그러기를 날마다 거듭하여 ‘평강의 사람’ 그래서 또한 ‘어디를 가든지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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