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소리
“이제는 거의... 제 이름도 잊어버리고 살아요. 누가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내 입으로 말할 일도 없고... 그냥 그렇지요 뭐...”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듯 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사람은 수 년 째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쳐버린 초췌한 모습에서는 아무런 의지도 읽어낼 수 없었고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여 두는 것조차도 귀찮아지는 일상을 갖게 된 사람은 자꾸만 빼앗기는 모양 속에서 자신의 ‘사람의 모양’마저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벌써 꽤 오래 전 TV화면에서 본 장면이었는데 조금 전 교회마당 저편에 서서 나를 부르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빠- 진지 드세요--”
봄이 되면 할 일이 많아지는 넓은 교회 마당 화단에서 이것저것 손 볼 일에 집중하다보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나 봅니다. “알았어--”라고 소리쳐 대답하는 중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저의 어릴 적 모습입니다. 한 여름 날의 뙤약볕에서 한창 정신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친구들과 뛰어 놀고 있는 중에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홍우야-- 밥 먹어라--”
엄마는 저 만큼 골목 안쪽 까지 들어와서는 큰 목소리로 저를 부르곤 하셨습니다. “에이- 엄마도 참-” 그때는 친구들 앞에서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간절히 꼭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싶은 그리운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 - 그래서 참 좋은 소리입니다. 엄마가- 아내가- 혹은 딸내미가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부르는 소리...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수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 그 중에서도 일부러 찾아 나서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는 사람의 삶 속에 결코 작지 않은 어떤 한 부분을 압축하여 놓은 한편의 그림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밥 때가 되었다는-’ 같은 내용의 부름이라도 제 아내의 경우는 조금 특이 합니다. 사방이 조용한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작은 소리도 생각지 않게 크게 ‘확대되는-’모양을 자주 경험하여 매우 경계하는 아내는 “효선아빠--”하고만 크지 않은 소리로 부릅니다. 제가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돌아보면 거기에는 한 손으로 입에다가 밥을 떠 넣는 시늉을 부지런히 하고 있는 아내가 서있습니다. 허허.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나를 찾는 모습인데-
휴-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면, “밥 먹어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많은 뜻과 내용을 함축시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엄마들이 그러는 것처럼 밥 먹고 공부해라는 말과 밥 잘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말, 그래서 쑥-쑥- 자라라는 말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그 속에서 선명하게 들어볼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내의 목소리가- 또 딸아이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군요. 그래서 목소리들은 각기 조금씩 다르지만 그 뜻과 내용만큼은 한결같은 사랑의 버무림으로 되어 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과연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가 사람은 행복합니다. 특히 엄마의 목소리가 그렇고 그중에서도 ‘밥 먹어라’고 부르는 소리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밥 때가 되면 어떻게든 먹여야 한다는- 아무도 가로 막지 못하는 ‘엄마의 사명감’이 가장 잘 두드러지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듯 밥 먹으라고 골목까지 나와서 부르는 엄마의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공부하라는 채근으로 불렀던 소리는 기억에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지기도 하였겠지만, 생활 보다 앞서 생존이 코앞의 당면문제이던 시절에 ‘나를 위해 차려 놓은 밥상’이 있음을 골목까지 따라와서 알려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떠한 말이나 미사여구로도 표현해내기 어려운- 엄마 그 자체였습니다...
엄마의 부르는 소리도... 아내의 소리도... 자식의 소리도 듣지 못하며 나의 먹을 것을 찾아 매일 매 때를 지친 다리로 움직여야만 하는 노숙자의 모습에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커다란 울림의 소리를- 그래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하-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한 것이로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먹든지... 말든지...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엄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지만, 그렇듯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기꺼이 불러주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밥 먹으라’고 불러주는 목소리들이 많아질 때에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 되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노숙자의 퀭-한 중에도 감출 수 없는 촉촉함을 언뜻 보여 주었던 슬픈 눈망울이 다시 한 번 떠오릅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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