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부활약
아내가 목 부위의 통증을 호소하여서 원주시내 단구동에 있는 삼성정형외과에 갔습니다. 진단도 받고 CT 촬영도 하고 물리치료도 받고 처방된 약을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약 봉투에 보니 ‘정신부활약(精神復活藥)’이라는 항목이 있네요. 허허 정신부활약이라- 저도 살아오면서 많이 아파도 보았고 그래서 약도 많이 먹어 보았습니다만, 정신부활약이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의약용어 쪽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정신부활약 <약학> 정신기능의 억제상태를 회복하는 약. 중추신경계통을 흥분시켜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부연 설명이 있는데- 우선 뇌혈관결손에 의한 2차 증상 및 변성, 퇴행성 뇌기질성 정신증후군 등을 언급하며 노인성 인식장애로는 기억력 저하, 착란, 방향감각상실, 의욕 및 자발성 저하, 집중력 감소 등을, 감정 및 행동변화로는 정서불안, 자극과민성, 관심부족 등과 그리고 노인성 가성우울증... 등에 사용되는 약을 ‘정신부활약’이라고 한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정신기능의 억제상태를 회복하는 약’이라는 설명에 눈이 가는군요.
‘부활(復活)’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살아난다’는 말로서 기독교 용어로 사용되어지는 단어 인데 일반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유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고 또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에만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의 부활’이지요. 하지만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만 국한 되어지는 경우이므로 일반인들에게는 역사 속 신화 전설 동화 만화 같은 비현실 속의 이야기들을 할 때만 극적(劇的)으로 사용되어지는 정도의 단어입니다.
정신(精神)의 부활(復活)이라- 단순도식으로라면 ‘죽은 정신을 다시 살려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를 일컬어 ‘죽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상기한 약학 설명 중에 있는 여러 가지 ‘정신기능의 저하’ 상태가 정답입니다. 그러나 또한 ‘정신상태’란 과학이나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꿈’ 같은 것입니다. 꿈이 무엇인지 왜 사람은 꿈을 꾸는 것인지 꿈속에서 보여 지는 영상은 인체 내의 어떤 기관에 의한 무슨 현상과 작용인지- 아직도 인류는 확연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신은 어디에 속하며 어떠한 신체 내부기관의 물리적 기능 혹은 활동에 의한 것인지 또 좀 더 광의로 나아가서는 무엇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우리는 모두 ‘정신’이 있어서 ‘정신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 있는 사람들’ 임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에 의거하여 생활을 유지하여 나가고는 있지만, 딱히 그 ‘정신’을 집어내어 설명하여 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모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정신부활약’이란 주로 늙거나 또는 어떤 질환에 의해서 기억력이나 감각기능 및 그 대처기능이 많이 떨어지거나 쇠퇴한 사람들에게 투약되는 것으로서 잃었던 기력이 회복되는 것처럼 정신력을 상태를 회복시켜주는 약이라는 설명을 보면서, 기억력이 되살아나고 사물에 대한 인식 및 대처기능 등이 좋아지는 것으로서 치매 등을 예방시켜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는 중에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잘 적응하고 협동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는 약이 있다는 것은- 그 임상실험의 결과나 실제의 효과 및 효능의 정도 여부에 앞서서 우선 마음이 위로를 받을 수 있기에 참 감사한 일입니다.
정신(精神)을 이야기 할 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영혼(靈魂)의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정신이 곧 영혼의 활동이라고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의 활동도 다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방면에는 연구도 많고 논문도 많고 실험도 있고 그래서 발표도 많지만 그러나 ‘하나의 정답’으로 모아진 적은 여전히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는 ‘사람’이지만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연구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면서도 그 정답은 아직도 하나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당대에는 정답이 나올까요? 아니면 앞으로 천년 시간이 더 지나야 할까요? 혹은 우리 인간들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문제로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있는 그 무엇일까요?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아파하는 육체 곧 현재 늙어가고 죽어가는 ‘육에 대한 죽음’은 물론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문제에 대하여서도 아무런 작은 근접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정신의 작은 회복의 접점이라도 애써 찾아내어서 거기에 ‘부활’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그 내심 속 소망의 일단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작은 생명도 죽은 것만큼은 다시 살려내지 못하는 이들의 한탄과 탄식이 있기에- 그러나 또한 그렇게 되어질 수 있기를 바라고 원하는 작은 소망의 불씨만큼만은 결코 훅-! 하고 간단히 쉽게 꺼버릴 수 없는 것이기에 막연한 소망으로 작으나마 의지의 날개를 펴고 광대무변한 공간 속 작은 부분을 막연히 날아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일찍이 이 세상에 먼저 출현한 선현들은, 알지 못함으로 일어나는 불안은 절망으로 치달으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고 과연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믿음으로 소망을 잃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영멸도 피할 수 있으니 곧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이며 우리를 그렇게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즉 이제부터는 죽음을 이기고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간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육체가 가는 길을 말한 것이라면 틀릴 것이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숨 쉬다가 죽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날마다 ‘죽을 준비’를 하면서 불안으로 절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아침안개’와 같은 지상에서의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는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정신부활약’으로 불안을 달래고 기억력이 되살아나고 그래서 평정을 되찾고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손 붙잡고 웃는 얼굴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보다 앞서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 영(靈)의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죽은 마음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아무도 결코 피할 수 없기에 ‘기어코 오고야 마는-’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부활’하여 싫든 좋든 벗어날 수 없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것이 늘 나의 마음의 현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멸망의 부활이냐 생명의 부활이냐의 판정 앞입니다. 그때- 생명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십시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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