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더 좋아
“'아들'을 '딸'보다 선호하는 분위기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반영, 지난해 출생 성비가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9일 통계청의 '2013년 출생 통계'에 따르면 여아 100명당 출생 남아의 수인 출생성비는 지난해 105.3으로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81년 이래 가장 낮다.”
라는 보도 뉴스를 보고 있자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말이 솔솔 떠오릅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지 몰라도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의 ‘아들’ 선호는 대단하여서 시집 온 며느리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들에게 첩을 얻어주거나 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무개 집 누구는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해서 쫓겨났다.”라는 말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고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얻는 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도 당시의 어른들은 쯧- 하고 혀를 차기를 했지만, 대체로 이해하고 묵인하여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일어난 엉뚱한 현상(?)이 바로 ‘딸 부잣집’들이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딸들을 이어 낳았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낳다보니 딸들만 수두룩... 그래서 7공주집, 8공주집으로 불리어지는 이름들이 생겨났고 저희 마을에도 만만찮은 딸 부잣집이 있는데 그러한 이름을 아예 간판으로 내걸은 영업집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집착한 ‘아들선호’ 사상 때문에 오히려 이 나라에 딸들을 더욱 팽창케 하는 현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딸만 둘입니다. 그러나 더 낳지 않았습니다. 저의 세대만 하여도 ‘아들선호’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희석되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크게 서운해 하거나 문제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래도... 하나만 더 낳아보지 그러냐...” 하시곤 하였지요.
그러한 아들선호 사상을 희석시키고 늘어나는 인구를 제한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키우자.” 또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잖다.” 는 등의 구호와 표어를 내걸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그때만 하여도 정부의 심의와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영화계에도 입김이 작용을 한 것일까요? 60~70년대 영화들 가운데 “딸 부잣집” “딸이 더 좋아” “7공주집” 등의 제목들이 유행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그러한 문구와 제목들은 딸 편견을 향하여 따져 묻는 소리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여전히 공허한 외침에 머물렀고 내용들도 그저 스크린화면 속에서 해프닝 정도를 보고 웃고자 하는 코미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들과 딸에 대한 명백한 구분적 풍속도 속에서의 “구별 말고-”는 그렇게 힘을 얻지 못하고 80~90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 말린다’는 말처럼 ‘아들선호’역시 인위적인 정책이나 제도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말릴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아들과 딸의 성비율이 이렇게 평행선을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겠습니다만, 저는 어떤 인터넷 논객의 댓글 중에서 본 “아들 낳아봐야 아들 구실도 못하고...”하는 대목을 주목하게 됩니다. 즉, 아들이라면 장차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야 하고 가장은 가족들을 이끌고 먹여 살리고 자녀들을 교육하여야 할 책임이 있고... 하는 ‘가장 책임론’의 논지는 변함이 없지만 이 사회의 취업의 벽은 자꾸만 높아지는 것으로 곧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특히 ‘자녀 교육비’의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의 무거운 질량감으로 엄습하는 현장 속에서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점점 더 버거운 것이 되어가고 급기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기에 젊은이들의 결혼기피 현상에 이르기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꾸만 채근을 당하고 내몰리게 되는 남자들은 결국 ‘남자의 자리’와 역할들을 점점 더 여자들에게 내어주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하여도 여자들의 일이 될 수 없었던 ‘남자들의 일’들이 여자들의 수중에 떨어지게(!)되었지요. (다른 표현으로는 덤태기를 쓴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한 가정을 이끌고 살아가면서 가장 큰 일이 ‘돈 버는 일’이다 보니 남자든 여자든 돈 잘 버는 사람이 실질적인 가장이 되고 대표가 될 수밖에 없고 작금에 이르러 여자들의 사회적 활동 역시 남자와 평준화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고개 숙인 남자’들의 양산은 계속 될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리고 꼭이 경제적 문제의 주도에서가 아니더라도 이른 바 베이비붐 시대서부터의 남자들 곧 아들들에 대하여서 그 부모님들을 실망이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기껏 어야둥둥 키워 놓았더니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만 “마누라 치마폭 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는-” 것 같은 당신의 아들들에 대한 ‘못난 모습’ 때문입니다. 긴 호흡으로 볼 때 사실 그렇습니다. 수 천 년 면면히 이어오던 남자들의 ‘가부장’으로서의 풍모는 다 없어져 버리고 작금의 사회 현실 속에서 안(가정)에서의 일이든 밖(직장)에서의 일이든 전전긍긍 내지는 숨죽이고 눈치 보며 살아가는 ‘남자의 역할’이 점점 더 사실화, 현실화, 보편화 되고 있습니다.
옛날고대에서는 ‘모계사회(母系社會)’의 구조와 균형이 절대적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 그보다 더 원시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자를 신(神)으로 섬기던 풍속도 있었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대(代)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여자의 몸을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능력과 신비의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이란 말 그대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이겠습니다만, 지난 시대 속에서는 그저 원론적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이제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각계각층에서의 여자의 역할에서는 물론, 여성 대통령도 나왔고 더하여 이렇듯 성비율도 남녀 평준화가 되었으니- 바야흐로 진정한 ‘남녀평등’의 시대가 오는 것일까요? 아니 오히려 그렇게도 남자들이 콧방귀를 뀌던 ‘여성상위(女性上位)시대’가 드디어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하여 조만간 여자들이 주창하는 남녀평등이 아니라, 남자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나와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르짖는 ‘남녀평등’의 외침의 시대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요? 허허.
딸이 있습니까? 당신을 비행기 태워 줄 복덩이입니다. 딸이 여럿입니까? 그렇다면 ‘복덩이 밭’에 있는 것입니다. 귀여운 딸들의 웃음소리로 늘 건강하고 복 된 날들이 이어지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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