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참새의 절체절명
우리 교회 마당에는 체구가 작은 개와 고양이가 있습니다. 개는 강아지 적에 마을 지인으로부터 분양 받은 것이고 고양이는 아주 작은 새끼 적에 스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 구석 외진 곳에서 밤새 야옹거리기에 먹을 것을 들고 손짓을 해 보았더니 의외로 졸졸졸 나와서는 받아먹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가족이 된 것이지요. 밤에 왔다고 해서 ‘밤이’라고 둘째 딸아이가 명명하였습니다.
두 마리 동물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밥도 함께 먹고 잠도 잘 잡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크면서부터 말썽이 잦군요. 꽃밭을 누비고 다니며 파헤치기도 하고 쥐를 잡아다가 마당에 떡- 하니 전시를 하기도 하고 창문 방충망을 긁어서 흠집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래도 강아지와 고양이가 한 데 어울려서 마당에 뛰노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건강해 보여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료이려니 하고 어지간한 일들은 감내합니다.
그런데 오늘 계속 되는 가뭄으로 자꾸만 말라가는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밤이가 뭔가를 물고 저한테 다가옵니다. 가까이서 보니 ‘참새’입니다. “얼른 이리 내놓지 못해-” 빼앗아서 손에 놓고 살펴보니 아직도 입가 양쪽 끝에 노란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어린 새끼입니다. 다행히 몸에 별다른 상처는 없고 작고 까만 눈을 깜빡거리면서 나를 바라봅니다. 고양이는 사냥을 해서 금방 죽이지 않고 가지고 논다는 말을 몇 번 확인을 하였는데 또 그런 케이스가 분명합니다.
“넌 날개도 있으면서 왜 도망도 가지 못하고 잡혔니?” 쇼크가 컷 던 탓일까요? 여전히 작은 눈만 깜빡이는 녀석을 데려다가 쌀알 등 먹을 것을 주어 보았지만 먹지 않습니다. 놀란 심신이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공기가 잘 통하는 작은 상자에다 넣어 놓았습니다. 기력을 회복하는 대로 놓아주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에다가 놓아주어야 어미도 만나고 고양이에게 다시 잡히지도 않을지 연구 중 입니다.
고양이 입속에서 살아난 새끼 참새 - 모르긴 하여도 0.0001 퍼센트도 안 되는 생존 확률을 통과한 - 그야말로 구사일생의 경우일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를 만나서 일단은 살아났지요. 지옥의 문빗장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고나 할까요. 고양이 입에 물려 오면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젠 죽었구나? 자라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름하는구나? 엄마여, 친구들이여 안녕? 무슨 동화를 쓰는 것 같습니다만 - 여하튼 새끼 참새는 절망하였을 것인데 이렇듯 저 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습니다. 허허
그래서 물끄러미 새끼 참새의 깜빡이는 까만 눈을 바라보면서 ‘도움’이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TV에서는 연일 배우 안성기씨가 피골이 상접한 아프리카 아이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도움을 호소합니다. ‘인간극장’이라든가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도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영상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사고로, 가난으로, 질환으로, 범죄자의 손아귀에서, 그리고 왕따로... 괴로워하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현실은 고양이 입에 물려있는 새끼 참새와 같이 소망을 둘 곳이 전무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늘 넘쳐나고 또 그들을 돕는 착한 사람들 역시 많이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돕는 사람이 많아도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해결책으로 ‘돈’을 이야기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거지가 많은 나라가 미국이라는 어떤 기구의 발표 내용을 생각하면-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도움의 종결자’는 결코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돈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어진 바입니다.
우리 주변에 ‘항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 철학 또는 사회현상학을 논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저는 단순 무식한 논리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변 사람들, 곧 우리 모두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하여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 하면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처럼 아름다우면서 인간을 과연 ‘인간다운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일’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되어야 할 모형으로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돕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정직한 사람, 순수한 사람, 가르치는 사람, 발명하는 사람,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 등등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람들도 ‘돕는 사람’의 훌륭함과 위대함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돕는 사람은 위대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자신의 것을 ‘내어 놓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셈법도 하지 않고 눈 앞에 안타까운 모습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로 돕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 모두는 유치원 때부터 배워왔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지금 현재 어떠한 위치와 지위에 있든지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누구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그렇게 되어 진 경우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모처럼 한 번 깊은 심호흡을 하시면서 저 높이 푸른 하늘을 흘러가는 조각구름들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나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의 얼굴을 떠 올려 보는 것 말입니다.
고양이 입에 물려온 작은 새끼 참새 한 마리가 예의 그 작고 까만 눈을 깜빡이면서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나에게 준 교훈의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2-6-13
파일을 업로드하는 중입니다.